항목 ID | GC091013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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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136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참나무배기」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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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참나무배기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
관련 지명 | 강창나루공원 -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죽암리 1364 |
성격 | 지명 유래 전설|인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류후조|관원 |
모티프 유형 | 명사(名士)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참나무배기마을과 류후조에 대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참나무배기」는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는 참나무배기마을의 지명 유래 전설이면서 ‘낙동 대감’으로 불리던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1798~1876]에 대한 인물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참나무배기」는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 후기, 낙동강(洛東江)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주위에 아름드리 참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마을 주위에 있는 참나무로 달구지와 디딜방아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 용구를 만들어 사용하여 왔다. 참나무가 울창한 마을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참나무배기’ 또는 ‘참나무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낙파 류후조는 조선 후기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남인계(南人系)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고종 3) 우의정의 중책을 맡아 안동 김씨(安東 金氏) 세도 정치 종언에 따른 긴장된 난국을 원만히 수습하였다. 1867년(고종 4)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1872년(고종 9)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퇴관하고 봉조하(奉朝賀)[조선 시대에, 종2품의 관리로 사임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던 벼슬]가 되었다. 류후조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은거하고 있을 때였다. 상주는 서울에서 조령(鳥嶺)을 넘어 영남으로 이르는 길목이어서 높고 낮은 관원들이 오가는 길에 낙동을 지난다. 그래서 관원들이 관례처럼 낙동나루에서 10리[약 4㎞] 거리에 있는 우물리로 봉조하인 류후조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
관원들의 문안 인사가 잦아지자, 류후조는 “관원은 국가의 중책을 맡아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인데 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는구나. 내가 길가에 나가 앉으면 그들이 편리할 것이다” 하고 낙동나루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문안 인사가 훨씬 수월하여졌다. 그 후부터 사람들이 류후조를 낙동강 기슭에 사는 대감이라고 하여서 ‘낙동 대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참나무배기」의 주요 모티프는 ‘명사(名士)’이다. 명사는 말 그대로 뛰어난 선비를 말하는데, 남다른 학식과 예지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인과 통하는 면이 있다. 탁월한 인격이나 업무 처리 능력 등을 보인 학자와 관리, 뛰어난 필력을 발휘한 문인 또한 명사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류후조는 중앙의 고위 관리를 역임하면서 조정의 일을 잘 처리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자신에게 인사 오는 관리들을 배려하는 훌륭한 인품을 보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명사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참나무가 많아 ‘참나무배기’로 불리게 되었다는 낙동면 인근 마을의 지명 유래 전설과 류후조에 대한 인물 전설이 함께 전승되고 있는데, 류후조가 태어난 곳인 중동면 우물리에서 낙동으로 이사하면서 ‘낙동 대감’으로 불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