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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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곽현희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7년 12월 1일 - 「행주형의 상주」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한 『상주 이야기』 1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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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행주형의 상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
관련 지명 | 동해사 - 경상북도 상주시 서곡3길 173[서곡동 227-1] |
관련 지명 | 흥인지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8[종로 6가 69] |
성격 | 역사 전설|인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무학대사|이성계|정도전 |
모티프 유형 | 인물담|풍수지리담|대결담|지명 유래담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조선의 승려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행주형의 상주」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를 도와 조선 왕조 건국에 기여한 승려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에 관한 전설이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위하여 한양 터에 궁궐 짓는 일을 돕다가 상주로 돌아와 동해사(東海寺)를 창건하게 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채록/수집 상황]
「행주형의 상주」는 2007년 12월 1일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한 『상주 이야기』 1권과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터를 잡아 놓고 궁을 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궁을 지으려고 하자 궁이 계속 쓰러졌다. 이성계는 사물의 이치를 잘 아는 승려를 찾아 묻기 위하여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월정사(月精寺)로 찾아갔다. 그러나 겨우 찾아낸 노승은 이성계의 청을 거절하며 말하였다. “소승은 나이가 많아서 몸을 가눌 수 없으니, 절 너머 바위굴에 홀로 있는 중을 데려가시오.” 바위굴에 가니 노승의 말대로 중이 한 명 있었다. 이성계는 중을 데리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성에 들어서자마자 중이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중은 절묘한 도성 터에 취하여 춤을 추었는데, 중의 모습이 마치 춤추는 학과 같다고 하여서 사람들이 ‘무학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한양 터를 보고는 학이 날개를 펴고 훨훨 나는 형세인 비학상천형(飛鶴上天形)인 것을 알았다. 한양에 도성을 창건하려 할 때마다 성이 쓰러지는 까닭은 학의 날개를 누르지 않고 궁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무학대사가 조언한 대로 담을 먼저 쌓고 나서 궁을 세웠더니 궁이 쓰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궁의 좌향을 정할 때, 무학대사는 해좌사향(亥坐巳向)[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을 주장하고,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자좌오향(子坐午向)[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정북 방향을 등지고 정남향을 바라보는 방향]을 주장하였다.
궁의 좌향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정도전은 “해좌를 놓으면 유교는 쇠하고 불도만 왕성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정도전의 말을 듣고 무학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좌를 놓으면 가까운 혈족과의 싸움이 심하여지고 외적의 침입이 잦아집니다.” 이에 정도전은 “‘동대문’ 현판을 쓸 때 갈 ‘지(之)’ 자를 넣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쓰면 외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고, 문물이 성행합니다”라고 하였다.
무학대사는 정도전에게 밀려 한양을 버리고 상주로 내려왔다. 상주는 터는 좋으나 배가 떠나가는 모양새인 행주형(行舟形)임에도 큰물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건물이라도 하나 지어 물의 힘을 돕겠다면서 동해사를 창건하고 절의 이름에 바다 ‘해(海)’ 자를 넣어 지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행주형의 상주」의 주요 모티프는 ‘풍수지리’, ‘무학대사’, ‘정도전’, ‘비학상천형의 도성 터’, ‘행주형의 상주’ 등이다. 「행주형의 상주」는 고려 말엽 실존 인물이었던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이다.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은 전국적으로 전승되는 광포 전설로서, 크게 무학대사의 출생담, 출가담,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로 분류할 수 있다. 「행주형의 상주」는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에 해당한다.
「행주형의 상주」에는 무학대사가 풍수지리로 도성 터의 문제를 해결한 내용, 풍수지리로 정도전과 대결한 내용, 상주에서 동해사를 짓게 된 유래 등 다양한 내용이 결합되어 있다.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것은 풍수지리 사상이다. 「행주형의 상주」 속에서 무학대사는 풍수지리 지식을 가지고 자연의 형세를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나타난다. 또한 풍수지리 사상을 가지고 정도전과 설전을 벌이는데, 혈족 간의 다툼이나 외적과의 전쟁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도성의 방향을 함부로 정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를 통하여 당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 풍수지리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학대사는 풍수지리를 이용한 정도전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는데, 조선 건국과 함께 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전면적으로 등장하면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행주형의 상주」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정도전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동대문’ 현판에 ‘흥인지문’을 쓸 것이라는 내용과, 행주형인 상주에 물을 더하기 위하여 절 이름을 바다 ‘해(海)’ 자가 들어간 동해사로 지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문자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옛 사람들의 인식이 이야기에 내재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