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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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駿九 |
영어공식명칭 | Cho Jungu |
이칭/별칭 | 여관(驪寬)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개항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조준구(趙駿九)[1823~1902]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여관(驪寬)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용연(趙龍然)이고, 할아버지는 조술요(趙述堯)이다. 아버지는 조욱영(趙郁榮)이고, 어머니는 최봉우(崔鳳羽)의 딸 완산 최씨(完山 崔氏)이다. 부인은 강선영(姜選永)의 딸 진주 강씨(晉州 姜氏)이다.
[활동 사항]
조준구는 1823년(순조 23) 상주에서 태어났다. 1865년(고종 2) 음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869년 황간현감에 제수되었다. 이후 옥천군수와 순흥부사를 거쳐 1877년 무안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옥천군수 재임 중 도결(都結)에서 이익을 취하고 민전(民錢)을 몰래 빌렸다는 암행어사의 보고로 1878년 무주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났다.
조준구는 1882년 김포군수에 제수되었고, 1883년 선산부사로 부임한 뒤에는 재임 중 진휼을 베풀어 포상을 받았다. 1885년 김제군수를 거쳐 1886년 청주목사가 되었고, 1887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밀양부사를 대신 맡기도 하였다. 1893년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석 달 동안 4만 냥의 돈을 횡령하였고, 1894년 분노한 김해 농민들의 봉기로 고을에서 쫓겨났다. 조준구는 나포되어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895년에 풀려났으며, 만년에는 상주에서 형편이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는 ‘의장소(義庄所)’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조준구는 1902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