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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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 共同體 信仰 |
영어공식명칭 | Community Faith in Sangju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영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마을을 비롯한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행하는 집단 신앙 행위.
[개설]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전하여 오는 공동체 신앙의 대표적 형태로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자 지내는 마을 단위의 제사, 곧 동제를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솟대 신앙, 기우제 등이 상주 지역 공동체 신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동체 신앙의 자연지리적 배경]
공동체 신앙은 무엇보다 지역민들이 생업을 지속하면서 자연환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특징적 양상이 구조화된다. 상주시는 소백산맥이 영남과 충청의 경계를 이루는 경상북도 서북단에 있어, 서쪽·남쪽·북쪽은 속리산 천왕봉, 문장대 등 기암괴석의 비경이 어우러진 높은 산악 지대이며, 동쪽은 낙동강 유역을 따라 발달한 기름진 평야 지대로서 예부터 경상북도 굴지의 곡창 지대로 유명하다. 전체적으로 백두대간에서 동쪽으로 낮아지는 동저서고(東底西高) 지형으로서 상주의 하천 대부분은 동쪽에 있는 낙동강 수계에 속하며, 백두대간의 서쪽은 금강 수계에 속한다.
또한 상주시는 경상북도 서북단에 치우쳐 있으므로 경상북도의 남부와 동부 지역보다는 안동시, 문경시, 예천군 등의 북부 지역과 충청북도의 괴산군, 보은군, 영동군 등과 교류가 잦은 편이다. 상주시는 낙동강 중류가 동쪽을 관통하는 곳에 있어 예로부터 토양이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 교통의 요충지로서 교통이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따라서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으로 공물을 수송하였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물자 수송이나 인적 교류가 빈번하였다.
또한 동북부에서 남부로 이어진 선을 경계로 서쪽에 높은 산지가 많고 동쪽에 낮은 들판이 넓어 동저서고의 지형을 나타낸다. 수정봉에서 국수봉을 잇는 선을 경계로 한 서쪽의 산지는 서북부의 청화산에서 속리산을 지나 남-동 방향의 봉황산, 백학산,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경계로 세분된다. 따라서 상주의 지형은 크게 동부 저지, 백두대간 동쪽의 서북부 산지, 백두대간 서쪽의 서남부 분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상주 지역의 지리적 여건은 평야 지역과 산간 지역의 특징적 신앙 행위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상주 지역의 동제]
동제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마을이 주체가 되어 동신 또는 당신으로 불리는 마을의 수호신을 대상으로 일정한 시기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대개 마을 주민이 주최하여 동제가 진행되지만, 과거에는 관청이나 신분 계급에 따른 제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상주 지역의 동제는 기원하는 대상이 자연물, 부처, 신 등 제각각이라 하더라도 제사 음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고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은 유교식 제의의 절차를 따른다. 상주 지역의 동제에 올리는 제사 음식은 대부분 돼지고기, 삼실과, 떡 등이며 포, 나물, 어류 등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이안면 흑암리와 같이 육류나 어류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동제는 정월대보름으로 넘어가는 열나흗날 밤에 진행하지만, 간혹 정월 초이레나 열이튿날 또는 마을에서 정한 날에 지내는 경우도 있다. 동제를 지내고 나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음복을 하고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거나 민속놀이를 즐긴다.
상주의 동제 가운데 하송1리 동제는 매년 정월 열나흗날에 산제당[산신당]과 동구나무인 동제당에서 동제를 지내는데, 견훤왕과 두 부인을 동신으로 모신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산제당에서 먼저 제를 올리고 나서 동제당에서 제를 올리는데, 이로 보아 산신당과 동제당의 이원적 구조를 갖추고 있고 제당 간에 위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견훤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동신으로 모신 구체적 이유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지역의 역사적 사건이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자연환경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변화하는 공동체 신앙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한편, 만산동의 천봉산 성황제는 제의 주도 집단의 성격이 관(官)에서 마을의 주민으로 변화한 것이 특징적이다. 당초에 천봉산 성황제는 읍치 성황제로 정착하였다가 점차 민간의 동제로 전환되었는데, 향리들이 제의를 올리고 관리하던 제당이었기에 더욱 강하게 지속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천봉산 성황당의 성황신[서낭신]이 초기에는 나라를 지키는 군사 수호신으로서 관의 치성 대상이 되면서 고을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국가의 공인된 사우(祠宇)였다가, 점차 길목을 오가는 사람에게 들러붙는 잡귀와 재액을 떨쳐 버리는 서낭신과 결합되면서, 관과 민이 받드는 이중적 신앙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솟대 신앙]
민속신앙의 대상 가운데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운 것이다. 때로는 풍수지리상으로 마을의 형국이 행주형(行舟形), 즉 물을 헤치고 배가 나아가는 모양의 형국일 경우, 마을에 돛대를 상징하고자 솟대를 건립하였다. 또 때로는 과거 급제를 기념하려고 세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행주형 지세의 솟대나 급제 기념의 솟대도 나중에는 마을의 제액초복(除厄招福)이나 풍농, 그리고 개인의 안녕을 위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솟대는 대체로 마을의 입구에 세워지는데, 마을 입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초자연적 존재도 드나드는 장소로서 때로는 재액(災厄), 악역(惡疫), 부정(不淨)이 침입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우는 것은 마을 밖에서 오는 부정을 막으며 마을의 신성을 지키려는 것이며, 마을의 안과 밖을 나누어 마을을 외부와 경계 지어 신성한 공간으로 보호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솟대는 마을 공동의 풍요을 기원하는 지역민의 소박한 바람이 깃든 신앙의 대상이다.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상주시에서는 사벌면 원흥리에서 전승되고 있는 솟대를 통하여 솟대 신앙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원흥리의 새리마을[원흥1리]은 넓은 평야 지대의 마을로서 농경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솟대가 민속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부터 마을 사람들은 솟대를 마을 공동체의 제액초복과 풍농, 그리고 개인의 안녕을 위한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 형태를 보면, 새리마을 입구의 버드나무 숲에 다듬지 않은 향나무 고목 두 개를 세웠는데, 큰 나무는 410㎝, 작은 나무는 370㎝이며 나무에는 어떤 인위적인 구조물도 설치하지 않았다. 솟대 앞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가로 90㎝, 세로 52㎝, 높이 40㎝의 긴네모꼴 상석(床石)을 두었다. 상석은 원래는 없었는데, 과거 원흥1리의 상신당(上神堂)에 있던 제단을 동네가 없어지고 지금의 원흥1리와 합치면서 하신당인 솟대에다 옮겨 놓은 것이다. 원흥1리의 솟대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하여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934년 홍수에 멀리 떠내려간 것을 다시 찾아 모시면서 지금의 마을 입구에 세우고 산신당이 있던 원흥1리 마을과 합쳐지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솟대가 한 쌍의 고목으로 된 것도 특이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고목이 썩지 않고 있어서 주민들은 매우 신성시한다. 원흥리의 솟대는 철새나 오리의 조각이 없지만 물의 풍부함을 상징하며 풍농을 가져다주는 마을의 주신으로 여겨진다.
[기우제]
과거부터 농경사회에서 여름철에 심한 가뭄이 오면 가뭄을 모면하고자 신령에게 기원하는 기우제를 올렸다. 강우는 농경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갖기 때문에 기우제는 농번기나 파종기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기적이며 비주기적인 제의로서 개인이 아니라 마을 혹은 고을 단위의 공동체 의례로 진행되었다.
현재 상주 지역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우제를 지냈으며 특히 심한 가뭄이 들면 상주시의 안산으로 불리는 갑장산 ‘용지’터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상주 지역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하는 갑장산은 상주 3악(三嶽), 곧 연악(淵嶽)의 갑장산, 노악(露嶽)의 노음산, 석악(石嶽)의 천봉산 중 하나인데, 산의 북쪽 정상에 산 모양이 연꽃 봉오리와 같이 형성된 곳이 있어 ‘구룡연’이라 부르고, 그 중간에 산신제단, 솟대목, 그리고 용이라는 우물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와 달리 근래에는 민간인 개인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구룡연의 용지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고 돼지머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올리니 3일 만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갑장산의 기우제는 조선 후기 문인 이경유(李敬儒)의 『임하유고(林下遺稿)』에 나오는 기우문을 통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산신에게 기우제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우뚝한 이 산[갑장산]은 하늘 높이 노음산[노악]과 함께 서남방으로 대치하여 우리 상주인들의 첨망(瞻望)으로 이 산의 영험이 매우 맑게 알려졌다. 모든 홍수와 가뭄이 일어날 때마다 이 산에 기도하면 그 반응이 빨라서 비를 원하면 비가 오고 비 개기를 바라면 곧 비가 그쳐서 매번 소원을 비는 제사를 올리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이는 곧 이 산의 신령이 있기 때문이다.”
기우제는 산신과 용왕에게 올리는 것이 보편적인데, 용왕이 기우제의 대상 신이 되는 것은 강우와 치수의 조화 능력을 가졌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산신에게 올리는 형태인 상주 갑장산의 기우제도 구룡연 용지의 우물에서 기우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아 ‘용’과의 관련성이 확인된다. 지역민들은 용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기우제 제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제단 주위 일대를 ‘용지터’라고 부른다. 용지터에 암매장을 하여도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심한 가뭄이 들면 용지터에 매장한 일이 있는지 의심하고 “메[무덤] 파러 가자!”라고 하였다는 말이 전하여진다.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경우는 『상주의 문화』에 소개된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93년에 낙동면 용포리 잿마에서 지냈던 사례를 살펴보면, 마을 이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이나 돈을 나누어 걷어 제사 비용을 마련한다. 제물은 상주장에 나가서 생돼지머리와 삼색실, 그리고 소주와 음료수를 3병씩 준비한다. 제관과 마을 주민 모두 용지에 올라 정성껏 제물을 차려 놓고 산신제를 지내고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리며 “산신님네 하늘님네 게다가 이렇게 기도를 드리니 오늘 그저 많이 비를 맞고 가게 점지해 주옵시소”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산신축, 사해용왕축을 올리고 용지터에 큰 구덩이를 파고 불을 질러 연기를 내면서 모든 주민이 “불이야!” 하고 한참 동안 고함을 지르면 하늘이 감응하여 비를 내린다고 한다. 제삿날은 산신날이나 용날을 골라서 지내며,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절에 가면 안 된다.
그런가 하면 1960년에 구룡연 용지터에서 낙동면 주관으로 기우제를 올린 적도 있었다. 1960년 하지 전에 낙동면 일대에 가뭄이 심하여 모내기 철인데도 물이 없어 모내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낙동면에서는 구룡연 용지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면장이 제주가 되고 낙동면민이 주체가 되어 제물을 준비하였다. 제물은 산 돼지 한 마리와 주과포를 준비하고, 면사무소 직원과 지역민 등 20여 명이 초저녁에 갑장산 정상 구룡연 용지에 도착하여 산 돼지의 목을 현장에서 찔러 놓고 제물을 차린 후에, 자정이 되자 불을 피우고 제사를 올렸다. 기우제 3일 전부터 면민들은 집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근신하며 정성을 드렸고, 제의 절차는 일반 제사와 유사하지만 산신과 용신이 신위가 되었다. 이때 기우제를 지내고 용지의 물로 밥을 지어 먹고 새벽에 하산할 무렵 구름이 구룡연 주위에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그날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이 상주 지역민들에게 가뭄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마을과 지역사회의 농경민 모두에게 주어진 문제였기에 개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마을 주민과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대처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로 인식하였다. 이로써 기우제가 지역민들의 사회적 연대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