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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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인균 |
[정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조선 시대 전통 가옥.
[개설]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 있는 전통 가옥으로는 외서면에 있는 상주 우복 종택과 병암고택, 낙동면에 있는 상주 의암고택, 상주 양진당 등이 있다. 상주 지역의 고택은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 건축되었으며, 그중 상주 우복 종택은 상주 지역의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을 기리는 고택이기에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상주 양진당은 다양한 특징이 혼합된 건축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상주의 위대한 학자 우복 정경세]
경상북도 상주 지역 고택과 관련하여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이다. 조선 전·중기 빠질 수 없는 역사적인 인물이자, 상주시의 고택과 관련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00년경 고향으로 내려와 상주 우복 종택을 짓고, 조선 최초 사설 의료원인 존애원을 건축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후손이 건립한 상주 병암고택, 상주 수암종택의 위치를 정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등 상주시 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영남학파의 전통을 잇고 제자를 배출한 상주 대산루는 상주 지역에서 빠질 수 없는 건축물이다. 정경세는 상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문장과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예학에 매우 뛰어났다. 류성룡의 수제자로 영남과 기호 지방에서도 널리 인정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리하여, 1578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하였고, 1580년 류성룡의 제자가 되어 학문에 노력하였다. 1582년 진사에 뽑히고,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 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하였으며, 한때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 및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 이조정랑과 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 좌승지, 4월 경상감사가 되었다. 1600년 영해부사가 되어 고을을 안정시킨 후 겨울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607년 대구부사로 근무하였으며, 1609년 4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2월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1610년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된 후 대사헌, 승정원도승지, 의정부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국정에 심력을 기울였다. 정경세의 학문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 신석번(申碩蕃), 강진룡(姜震龍), 황뉴(黃紐), 홍호(洪鎬) 등이 있다.
[상주 고택의 특징]
상주 우복 종택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90[우산리 193-2]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영조가 하사한 땅에 1600년경 정경세가 고향에 내려온 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우복 종택은 5세손인 정주원 때부터 현재까지 대대로 살아오고 있으며, 불천위 사당과 서실, 강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주 우복 종택은 토담 안에 다섯 동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ㅁ자형으로 배치된 건물은 안채, 사랑채, 광채, 행랑채, 사당, 가묘로 이루어져 있다. 북서쪽 ㄱ자형 안채, 북쪽에 ㅡ자형 광채, 남동쪽 ㅡ자형 사랑채를 배치하여 ㅁ자형 건물 안에 각각의 독립된 배치로 건물을 구성하였다. ㄱ자형인 안채는 부엌, 안방, 윗방, 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어있으며, ㅡ자형인 사랑채는 사랑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랑채 2칸은 마루를 놓았으며,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식 건물이다. 건물 북동쪽에 있는 사당 안에는 정경세와 정종로의 불천위사당이 배치되어 있는 비교적 평범한 고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병암고택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918-3[우산리 112]에 있는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이다. 병암고택은 정경세의 6대 손이며,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의 현손이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선생의 동생인 재로(宰魯) 공이 1770년(영조 46) 건축한 고택이다. 사랑채만 현존하여 있던 것을 안채, 별채를 중수하여, 현재는 안채, 사랑채, 별채와 앞 쪽 3칸 평대문채, 오른쪽 구석 뒤주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 규모의 ㅡ자형 구조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모든 칸에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중간 벽을 튼 큰 방과 마루방 2칸으로 지어졌다. 별채는 ㅡ자형 평면이며, 방 앞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병암고택은 남부 지방 가옥의 안채와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상주 지역의 타 고택에 비하여 특이하다.
상주 의암고택은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2길 42-7[운평리 141-1]에 있는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이다. 상주 의암고택은 모임당(慕任堂) 연안 이씨(延安 李氏)가 1800년경 건립하였다. 1800년경 모임당 연안 이씨가 안채를 지었고, 사당, 사랑채, 안사랑채 등은 1920년 만당(晩堂) 조태연(趙泰衍)이 지었다. 고택 명인 ‘의암’은 조범구(趙範九)의 호로, 조범구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붙였다. 상주 의암고택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 왼편에 중문이 있다. 중문 안에는 ㅡ자형 안채와 ㄱ자형 곳간채가 있으며, 마당을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상주 의암고택은 조선 시대 양반과 서인이 공존하는 주거 생활의 특징을 잘 드러나는 자료로 중요한 건축물이다.
상주 수암종택은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중동단밀로 156-33[우물리 1102]에 있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𥘼)을 기리는 종택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와 녹사청,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안채의 마루방을 높여 누마루처럼 꾸민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후손이 관리하며 남긴 기록물 또한 온전히 보관되어 있어 가치가 남다르다. 본채 앞의 녹사청은 ㄴ자 형태로 정면 4칸과 측면 4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고종 시 좌의정 류후조(柳厚祚)가 봉조하(奉朝賀)를 제수받은 후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를 맞이하거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상주 양진당은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승곡리 214-3]에 있는 보물이다. 상주 양진당은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처가인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에서 옮겨 지은 것이다. 1980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가운데 칸 마룻도리에서 1807년(순조 7) 수리 기록인 묵서명(墨書銘)과 상량의 구멍에서는 1626년(인조 4) 건물을 지은 기록인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상주 양진당은 본성을 성실히 지켜 자연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교양하는 집[양오진(養吾眞)]에서 착안하여 지었으며, 건립 후 이름에 맞게 강학과 문회를 위한 역할을 맡아 왔다. 상주 양진당은 99칸의 ㅁ자형 집이나, 현재는 부속 건물이 사라지고 ㄷ자형으로 남아 있다. 앞 9칸, 왼쪽 4칸, 오른쪽 6칸의 양 옆이 다른 비대칭 구조를 보이며, 왼쪽에는 창고, 오른쪽은 방의 형태이다. 상주 양진당은 북방 문화적 요소와 남방적 요소가 혼합된 ‘고상식남방형’과 한옥이 정형되기 전까지의 고상형 주가에 저상형 구들이 삽입 절충된 점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북방적 특징으로는 방을 두 줄로 배치한 점과 모두 구들을 들여 한겨울 차가운 공기의 영향을 줄인 것이다. 남방적 특징으로는 건물을 땅에서 1m 정도 높여 지어 지열의 영향을 덜 받도록 설계하였다는 점과 수해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이러한 상주 양진당은 두 방식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의 정형화된 한옥이 등장하기 전의 과정 속에 생겨난 건축물이기에 높은 가치를 지닌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황]
상주 우복 종택과 상주 수암종택은 후손들이 거주하며 잘 관리하고 있으며 여행객들에게 개방하여 가치를 알리고 있다. 정경세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기에, 발자취를 따라 여행 오는 여행객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관련된 유산들이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유산으로 승격 또는 지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상주 관광에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