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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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化寧場戰鬪 |
영어공식명칭 | Battle of Sangju Hwaryeongja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7월 17일 - 화령장전투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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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7월 25일 - 화령장전투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화령장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국군 제17독립연대|북한군 제15사단 |
[정의]
6·25 전쟁 초기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전개된 전투.
[개설]
화령장전투(化寧場戰鬪)는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7~25일 국군 제17독립연대가 북한군 제15사단을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교통 요지인 화령장(化寧場)[현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일대에서 격퇴한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불법 남침 후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한다. 한국군과 미국군은 ‘평택-충주-울진’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미군은 금강 남쪽 지역으로, 국군은 소백산맥의 ‘이화령-조령-죽령’ 지역으로 후퇴한다. 이에 북한군은 포위 섬멸 작전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15사단을 상주 지역을 통과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육군본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문경-함창-상주’로 이어지는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으며, 제1군단에 소속되어 있던 국군 제17연대가 제2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함창으로 이동하였다.
[경과]
1950년 7월 중순 북한군 제2군단은 소백산맥을 넘어 대전과 청주 지방에서 전투 중인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선봉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속리산 동쪽의 계곡으로 투입시켜 상주-김천을 축으로 하는 돌파구를 확보하고자 중앙 돌파를 하였다. 당시 국군 제1군단에서는 적정(敵情)이 불분명하여 이관수 소령이 지휘하는 군단 정찰대로 하여금 화서면과 화북면 사이의 공백 지대를 정찰하게 하였다. 7월 14일 2시에 명령에 따라 정찰대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 첨병 소대를 발견하고 기습하여 포로 12명을 사로잡은 뒤에 적정을 곧 군단에 보고하였다.
이에 육군본부에서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 중인 제17연대를 화령장에서 정지시켜 정찰대와 함께 적을 현지에서 저지 격멸토록 하였다. 이로부터 매복 작전을 전개한 제17연대는 6일 동안에 걸쳐 봉황산 언저리 상달리와 중달리 그리고 동관리 등을 오르내리며 유리한 지세를 이용한 기습 작전으로 북한군 제15사단 주력 1,000여 명을 격멸하였다.
[결과]
7월 23일 현지에 도착한 제1사단이 임무를 인수하여 25일까지 지연전을 실시하여 군은 다시 전선 정비의 시간의 여유를 얻어 제1군단은 안동 지구로 이동하였고, 제2군단은 ‘함창-상주’ 축선을 방어하였다. 또한 미군 제24사단을 비롯한 제25사단과 제1기병사단도 상주-김천의 정면에 병력을 전개하는 등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령장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북한군의 전략 기도를 저지하였다. 즉 ‘김천-대구’ 축선을 조기에 확보하여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형성을 방해하려는 북한군의 전략 기도를 와해할 수 있었다. 또 화령장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약 일주일간의 시간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화령장전투는 국군의 재편성과 전선 조정을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곧바로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