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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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 聽竹 成灠 墓碣 |
영어공식명칭 | Sangju Cheongjuk Seongram Myoga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9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창국 |
건립 시기/일시 | 1702년 이후 - 상주 청죽 성람 묘갈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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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56년 - 성람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20년 - 성람 사망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2021년 12월 20일 - 상주 청죽 성람 묘갈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상주 청죽 성람 묘갈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상주 청죽 성람 묘갈 -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94-1 |
성격 | 묘갈 |
관련 인물 | 성람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높이 13㎝, 너비 132㎝, 두께 70.5㎝[비석받침]|165㎝, 너비 74.5㎝, 두께 20.5㎝[비신 높이]|높이 63㎝, 너비 93㎝, 두께 36.5㎝[이수] |
소유자 | 창녕 성씨 문중 |
관리자 | 창녕 성씨 문중 |
문화유산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성람의 묘갈.
[개설]
상주 청죽 성람 묘갈(尙州 聽竹 成灠 墓碣)은 조선 후기 문신 성람(成灠)[1556~1620]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묘갈이다. 성람은 본관이 창녕, 호는 청죽이며, 효릉참봉·공조좌랑·무주현감 등을 역임한 학자이다. 조선 시대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남언경에게 수업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이이와 성혼을 사사하였다. 1599년 상주 향촌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정경세, 이준 등과 함께 조선 시대 최초 사설 의료 시설인 존애원(存愛院)의 설립 등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1926년 간행된 『청죽선생유고(聽竹先生遺稿)』가 있다.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의 찬자(撰者)는 조익(趙翼), 전자(篆者)는 현손 성원징(成遠徵), 서자(書者)는 권상하(權尙夏), 각자(刻者)는 미상이다.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2021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건립 경위]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성람의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의하면 1650년 조익의 원문이 완성되었고, 1701년 권상하의 추기가 추가되었다. 1702년이라는 연도가 보이나 아랫부분이 인위적으로 지워져 있어 같은 해에 건립된 것인지는 미상이다.
[위치]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 94-1번지에 있다. 능암1리에 있는 능암주유소 앞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300m 정도 가면 나타나는 마지막 집 직전 도로 오른쪽에 있다.
[형태]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비석받침·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질은 모두 화강암이다. 비석받침은 윗면이 사선으로 좁아지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면을 고르게 다듬지 않아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이수는 양옆이 위로 살짝 좁아 드는 사다리꼴 형태로, 이수 뒷면은 앞면과 달리 독특하게 몸통 없이 용의 얼굴만 중앙에 크게 있고, 나머지는 용의 얼굴에서 퍼져 나오는 서기와 구름만이 조각되어 있다. 비석받침은 높이 13㎝, 너비 132㎝, 두께 70.5㎝이다. 비신은 높이 165㎝, 너비 74.5㎝, 두께 20.5㎝이다. 이수는 높이 63㎝, 너비 93㎝, 두께 36.5㎝이다.
[금석문]
상주 청죽 성람 묘갈 비문은 4면에 새겨져 있으며, 특이하게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면에서 뒷면 전반부까지는 조익이 찬한 성람의 생애 부분, 뒷면 후반부는 권상하의 추기, 뒷면 마지막 줄과 우측면에는 성람의 자손록(子孫錄)이 덧붙여 있다. 제액은 비신 각 면 상부에 가로로 있는데 전면에 ‘증공조참(贈工曺參)’, 좌측면에 ‘판(判)’, 후면에 ‘성공묘갈(成公墓碣)’, 우측면에 ‘명(銘)’이 새겨져 있다. 비신 전면의 전액 아래에는 세로로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먼저 ‘유명조선 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 행통훈대부공조좌랑 성공 묘갈명 병서(有明朝鮮 贈嘉善大夫工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行通訓大夫工曹佐郎 成公 墓碣銘 并序)’, 그다음은 찬자·서자·전자·본문·추기·자손록으로 이어진다. 추기 부분에는 ‘원문성어 숭정경인 후 오십 유이년 신사 권상하 추기(原文成於 崇禎庚寅 後 五十 有二年 辛巳 權尙夏 追記)’, 우측면 마지막에는 ‘숭정기원후 임오 유월 일---(崇禎紀元後 壬午 六月 日---)’이 새겨져 있는데, ‘일’ 아래는 인위적으로 비문을 지운 흔적이 남아 있어 정확한 글자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조익의 『포저집(浦渚集)』 권32 「무주현감 성공 묘갈명(茂朱縣監 成公 墓碣銘)」과 『청죽선생유고』 하 「부록」에도 실려 있다.
[현황]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나중에 시멘트로 제작된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비 주위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비석받침과 이수는 전체적으로 상태가 양호한 편이지만 비신의 표면은 풍화로 인한 박락 현상이 진행 중이다. 비문은 눈으로 관찰이 가능하나 비신 후면 하단부의 경우 광범위하게 표면이 떨어져 나가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상주 청죽 성람 묘갈은 성람의 생애를 알려 주는 역사적 자료이며, 묘갈 북서쪽의 묘소와 북쪽의 감모재(感慕齋), 청리면 율리의 존애원과 함께 성람의 생애를 알려 주는 훌륭한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