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지도첩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714
한자 商山地圖帖子
영어공식명칭 Sangsan Map
이칭/별칭 『상산지도』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재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상산지도첩자』 제작
성격 고지도
저자 금초
권책 1책 35장

[정의]

1890년에 금초가 제작한 상주목 지도첩.

[개설]

『상산지도첩자(商山地圖帖子)』는 1890년(고종 27) 금초(錦樵)에 의하여 제작된 상주목(尙州牧) 지도이다.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으며, 복사본을 영인한 자료만 전한다. 첫 장은 상주목 전체 개요도, 둘째 장은 읍내 전도이다. 이후 내동면도(內東面圖)부터 산북면도(山北面圖)에 이르기까지 모두 31개 면의 지도를 실었다. 지도첩 마지막에는 도합 호총(倒合 戶摠)과 결총(結摠)을 기재한 후 ‘서상산지도첩자후(書商山地圖帖子後)’를 실었다. 『상산지도첩자』는 간략하게 『상산지도』라고도 일컫는다.

[저자]

『상산지도첩자』는 후서(後書) 마지막 문구 ‘상장섭제격 하완 다산서(上章攝提格 下浣 茶山書)’를 보면, 경인년(庚寅年)[1890] 하순에 금초가 다산(茶山)이라는 호를 가진 상주 영장(營將)의 지시로 제작한 것이다. 한편, 『상산지도첩자』의 읍내 전도에는 읍성 동문 밖에 있는 상주 조공제(尙州 趙公堤)의 비석이 그려져 있다. 조공제는 1873년 10월 상주목사 조병로(趙秉老) 재임 당시에 쌓은 제방이다. 따라서 『상산지도첩자』의 제작 시기인 경인년은 조공제 축조 이후인 1890년이 된다. 이에 1890년 6월에 건립한 영장 정상우(鄭祥瑀) 송덕비를 근거로 하여 ‘서상산지도첩자후’에 기록된 다산을 정상우로 추정하여 왔다. 그러나 다산 스스로 경인년에 부임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1889(기축년) 11월에 부임한 정상우라기보다는 1890년(경인년) 7월에 임명된 유진두(兪鎭斗)로 추정된다.

[편찬/간행 경위]

『상산지도첩자』 후서에 의하면, 1890년에 절충장군(折衝將軍) 다산은 경인년에 상주 영장으로 부임하였다. 다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진을 설치하고 국난에 대비한 요충지 상주에 부임하여 관내를 늘 눈여겨보다가 금초(錦樵)를 시켜 상산일구(商山一區)를 첩자에 담았다. 다산은 상주진(尙州鎭)이 요충지임을 알고 읍지(邑誌)를 상고하였으며, 군사적 목적으로 상주진 관내를 앉아서 파악할 수 있도록 상주 읍내와 31개 면을 상세히 지도화하여 첩으로 제작하도록 하였다.

[형태/서지]

『상산지도첩자』는 1책 35장이며, 원본의 소장처는 알 수 없다. 상주고등학교 교사 황영목이 복사하여 둔 것을 1988년 『상주행정지』에 부록으로 영인하였으며, 상주대학교 상주문화연구소장 권태을(權泰乙)[1939~]이 1995년 『상주문화연구』 5집에 해제를 붙여 다시 소개하였다.

[구성/내용]

『상산지도첩자』 첫 장은 상주목 전체 개요도이다. 하천, 산, 면 단위, 주변 행정 단위와 거리 등을 밝힌 총괄도이다. 둘째 장은 읍내 전도인데, 성 내외의 호구 총수, 순영과 경성까지의 거리, 성 내외 공공 건물 배치와 명칭을 기재하였다. 이후 내동면도부터 산북면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31개 면의 지도를 실었다. 면마다 호총, 읍까지 방향과 거리, 면내의 동리명, 사원, 서원 등을 표시하였다. 모두 31개의 면도가 있다. 대평면도(大坪面圖)에는 백원(白元)과 사리(沙里)뿐이며, 호총 51호, 읍치(邑治)에서 북으로 20리[약 7.8㎞] 거리이다. 대평면은 19세기 초 외북면(外北面)에서 분리된 곳이며, 현재는 사벌국면 원흥리 일대이다. 권말에는 도합 호총 1만 5659호와 결총 1만 216결 41부 8속을 기재한 후 지도를 제작한 과정과 시기 등을 밝힌 ‘서상산지도첩자후’를 실었다.

[의의와 평가]

『상산지도첩자』상주목의 읍내 전도와 31개 면의 지도를 수록하고 있어, 19세기 말 상주 지역의 면과 동리의 위치와 호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