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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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嶺南邑誌 咸昌縣邑誌 |
영어공식명칭 | Yeongnam Eupji Hamchang-hyun Eupji |
이칭/별칭 | 「함창읍지」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1871년 경상도 함창현에서 편찬한 관찬 읍지.
[개설]
『영남읍지(嶺南邑誌)』 「함창현읍지(咸昌縣邑誌)」는 전국 읍지 편찬 사업의 성과물로서, 경상도 함창현에서 장당 20행인 책판 견본에 맞추어 편찬한 읍지이며, 경상감영에서 성책하였다.
[저자]
1871년(고종 8) 의정부(議政府)의 지시에 따라 함창현감이 『영남읍지』 「함창현읍지」를 편찬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1871년 의정부는 8도 감영에 지시를 내려, 고을마다 읍지, 지도, 사례대개(事例大槩)와 영, 진, 역지를 편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가운데 사례대개는 각 고을의 행정과 재정 등의 현황을 간단히 기록한 것이다. 당시 각 고을에서는 보고 과정에서 구지(舊誌)를 베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읍사례나 사례대개를 빠뜨리기도 하였다. 경상도 함창현에서는 장당 20행인 책판 견양에 맞추고, 지도를 실어 읍지를 편찬한 뒤 성책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상감영으로 보고하였다. 경상감영은 이러한 보고서들을 19책의 『영남읍지』로 엮었다.
현재 『영남읍지』[1871]는 상주를 비롯하여 창원·성주·김해·선산·거제·거창·하동의 읍지를 분실한 상태이다. 1898년 5월 4일 의정부 총무국장 이상재(李商在)가 학부편집국장 이경직(李庚稙)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각 군 읍지’ 92권에는 영남 19권이 기재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영남읍지』는 모두 19책으로 「상주목읍지」[1871]도 포함되어 있었다.
[형태/서지]
『영남읍지』 「함창현읍지」는 1871년 김세호(金世鎬)가 경상감사였던 시기에 편찬한 경상도 도지의 일부이다. 「함창현읍지」는 『영남읍지』[1871] 제5-3책에 수록되어 있다. 전체 29장으로 행자수는 20행 20자, 규격은 가로 20.8㎝, 세로 31.2㎝이다. 1930년대 후반 경상도 성주군 수륜면의 정원호는 『영남읍지』[1871]를 바탕으로 증보·첨삭하여 1940년에 『교남지(嶠南誌)』를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영남읍지』 「함창현읍지」 수록 항목은 함창현여지도(咸昌縣輿地圖), 강역(疆域), 건치 연혁, 군명, 성씨, 관직, 부곡(部曲), 봉름(俸廩), 공해(公廨), 창고, 조적(糶糴), 전부(田賦), 군액(軍額), 방리(坊里)[호구(戶口) 포함], 풍속, 형승(形勝), 토산, 진공(進貢), 사묘(祠廟), 교원(校院), 명산대천(名山大川), 불우(佛宇), 제언(堤堰), 교량(橋梁), 우역(郵驛), 봉수, 장시, 능묘(陵墓), 고적, 인물, 명환(名宦), 충효열(忠孝烈) 순이다.
호구는 1870년[경오식] 기준으로 원호 2,715호, 인구 9,998명인데, 『경상도읍지』 「함창현읍지」[1832] 원호 2,746호, 인구 9,873명과 수치가 다르다. 공해 항목에는 동헌(東軒) 등 주요 건물에 남긴 제영, 교원 항목에는 향교·서원·사(祠)·서당을 수록하였다. 명산대천 항목에서는 공검호 관련 기록을 길게 수록하였으며, 능묘에는 가야왕릉과 참판 표연말, 문광공 홍귀달, 양정공 채수, 교리 권달수, 함녕군 김요의 묘 위치와 비문 작성자를 기재하였다.
고적에는 가정(稼亭)부터 성악서당, 구향교까지, 인물 항목에는 고려의 김택(金澤)부터 위장(衛將)을 역임한 채명형(蔡命亨)까지 수록하였다. 명환은 환적(宦蹟)에 해당하며, 1866년 11월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에 폄체(貶遞)된 윤헌채(尹獻采)까지이다. 『경상도읍지』 「함창현읍지」[1832]와 비교하여 보면, 다수의 항목을 생략하였지만 다른 항목에 수록한 경우가 많고, 고을 인물을 많이 수록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남읍지』 「함창현읍지」는 19세기 말 경상도 함창현 지역의 인문 지리 및 자연 지리 정보와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