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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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三億 |
영어공식명칭 | Lee Same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향리.
[가계]
이삼억(李三億)[?~?]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지원(李枝元)이고, 아버지는 호군 이시발(李時發)이다. 아들은 상주 호장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의 여러 향리와 함께 향리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던 이경번(李慶蕃)이다.
[활동 사항]
이삼억은 성만징(成晩徵)에게 학문을 배웠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상주 향리들의 우두머리였던 이삼억은 깃발에다가 손수 “만강단침 섬적내이(滿腔丹忱 殲賊乃已)[가슴에 가득한 붉은 충정으로 적들을 섬멸하리]”라는 혈서를 쓰고, 동요하는 고을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때 조(曺)씨 성을 가진 사람이 피난을 칭하며 고을 관아로 들어와 적의 군세를 과장되게 이야기하니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삼억은 조씨를 체포하고 문인 정홍주(鄭弘周)로 하여금 탐문케 하니, 경상도에서 난을 일으킨 정희량(鄭希亮) 무리가 충청도의 이인좌와 합세하려고 첩자를 보내 소란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일행들을 잡아 효수하였다. 이삼억은 이후 복호(復戶)되었으며, 향리역을 면제받았다. 관직은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이삼억은 사망한 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상주시 무양동 197-3에 이삼억과 후손들의 충효를 기리는 이삼억 삼세 충효각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