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964
한자 金德永
영어공식명칭 Kim Duk-young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1월 8일연표보기 - 김덕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4일 - 김덕영 황해도 사리원에서 군자금 징수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4월 - 김덕영 안악군에서 군자금 모금
몰년 시기/일시 1921년 7월 7일연표보기 - 김덕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4년 8월 15일연표보기 - 김덕영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거주|이주지 금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중국 - 중국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임시군사주비단 소단장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덕영(金德永)[1887~1921]의 본적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이다.

[활동 사항]

김덕영은 1887년 1월 8일 아버지 김유(金鍒)와 어머니 남숙원(南淑媛)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원조·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임시군사주비단(臨時軍事籌備團)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는 한편 소단장 겸 서기로 활동하였다. 황해도 사리원(沙里院) 일대에서 활동하던 임시군사주비단은 10명을 분단, 10개 분단을 소단, 10개 소단을 연단으로 각각 조직하여, 연단을 총괄하기 위하여 사령부를 두고 사령장이 지휘하는 계통을 갖고 활동하였다.

김덕영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주로 3·1 운동에 참여한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나석주(羅錫疇)를 중심으로 동지들과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즉 재령군 북율면 북지리의 최호준(崔皓俊), 남지리의 최세욱(崔世郁), 그리고 신계군 적여면 평촌리의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 등과 함께 나석주의 집에 모여 독립운동 방략을 토론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 결행을 논의하였다. 주로 군자금을 모아 해외로부터 다수의 브라우닝(Browning)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나석주의 집을 거점으로 삼고 군자금 조달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김덕영은 나석주,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과 함께 권총을 소지하고, 1920년 1월 4일 저녁 황해도 사리원 시북리 237번지의 황해도 대표 부호 최병항의 집으로 갔다. 김덕영 등은 최병항의 집을 포위하고 현금 630원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집을 떠나면서 “경찰서에 우리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려라”고 하였을 만큼 대담하게 행동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리원경찰서에서는 경찰력을 집중하여 김덕영 등을 추적하였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20년 3~4월경에는 변장을 하고 각기 권총을 휴대한 채 안악군 읍내 장날 부호 김응식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나석주 등과 거사를 지속하였다.

군자금 모금 활동으로 일제 경찰이 황해도 일대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이른바 ‘범인’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김덕영은 나석주와 함께 1920년 음력 9월 22일경 진남포를 통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뒤였다.

김덕영은 1921년 7월 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덕영의 공적을 기려 2004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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