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015
한자 張志淵
영어공식명칭 Jang Ji-yeon
이칭/별칭 장지윤(張志尹),화명(和明),순소(舜韶),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덕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 11월 30일연표보기 - 장지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9년 1월~8월 - 장지연 『시사총보』 주필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9년 9월 - 장지연 『황성신문』 주필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2년 8월~1906년 1월 - 장지연 『황성신문』 사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 장지연 『해조신문』 주필 초빙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0월 -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 초빙
활동 시기/일시 1913년 7월~8월 무렵 -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 사임
활동 시기/일시 1914년 12월 - 장지연 『매일신보』 객경 초빙
몰년 시기/일시 1921년 10월 2일연표보기 - 장지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장지연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86년 7월 17일 - 위암장지연선생기념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장지연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연표보기 - 장지연 서훈 취소
출생지 상주시 - 경상북도 상주시
거주|이주지 진주시 - 경상남도 진주시
거주|이주지 창원시 - 경상남도 창원시
묘소|단소 현동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성격 언론인
성별 남성
본관 인동(仁同)
대표 관직|경력 『황성신문』 사장|『경남일보』 주필|『매일신보』 객경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언론인.

[가계]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처음 이름은 장지윤(張志尹),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이다.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부인은 벽진 이씨(碧珍 李氏)이다.

[활동 사항]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이후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다.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應製科)에 입격하였지만,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하였다. 1894년 2월 마침내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임명되지 못하였다.

장지연은 1897년부터 중앙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7년 1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청하는 만인소(萬人疏)의 제소(製疏)를 맡았고, 1897년 2월에는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에는 사례소(史禮所) 직원(直員)에 임명되었고, 1897년 9월부터 1898년 10월까지 내부(內部) 주사(主事)를 겸직하였다.

이후 장지연은 언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지연의 언론 활동은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898년 4월부터 1902년 7월까지 장지연이 언론 매체에 처음 참여하여 활동한 시기이다. 장지연은 1898년 4월 『경성신문(京城新聞)』을 인수하여 『대한황셩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1898년 9월 『대한황셩신문』을 『황성신문(皇城新聞)』으로 개편하여 창간할 때도 참여하였다. 장지연은 1899년 1~8월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을 지냈다. 1899년 9월에는 『황성신문』 주필로 취임하였지만 몇 달 뒤 그만두었다. 장지연은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1902년 8월부터 1906년 1월까지 장지연이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활동한 시기이다. 장지연이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한 시기는 신문 경영이 매우 어려운 때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을 힘겹게 이끌고 나가는 한편 논객으로도 직접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장지연은 1905년 11월 20일 자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였다. 이로써 장지연은 일제에 붙잡혀 투옥되었고, 『황성신문』도 정간당하였다. 1906년 1월 출옥하였고 『황성신문』도 복간이 허가되었지만, 장지연은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세 번째 시기는 1908년 2월부터 1913년 7~8월 무렵 장지연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하는 『해조신문(海朝新聞)』과 경상남도 진주군에서 발행하는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초빙되어 활동한 시기이다. 장지연은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해조신문』 주필에 취임하였다. 1908년 5월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1908년 9월 귀국하였다. 이후 1909년 10월 진주군에서 창간한 『경남일보』 주필로 초빙되었다. 장지연은 1911년 10월 진주군으로 이사하였으나, 1913년 7~8월 무렵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뒀다. 거처도 진주군에서 경상남도 마산부(馬山府)로 옮겼다.

네 번째 시기는 1914년 12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장지연이 일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 객경(客卿)으로 초빙되어 활동한 시기이다. 장지연은 1914년 음력 10월 무렵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 12월 장지연은 『매일신보』의 객경으로 초빙되어 1918년 12월까지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하여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글도 여러 편 포함되었다. 장지연은 1919년부터는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장지연은 1921년 10월 2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장지연은 언론인이자 학자이기도 하여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주요 저술로는 『지진설(地震設)』·『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 등이 있다. 장지연의 저술은 후대에도 편찬되었다.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위암문고(韋庵文稿)』, 1979~1989년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가 편찬한 『장지연전서(張志淵全書)』[전 10권], 2004년 위암장지연서간집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위암장지연서간집(韋庵張志淵書簡集)』[전 3권] 등이 대표적이다.

[묘소]

장지연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에 있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나,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2011년 경상남도청은 장지연 묘소의 문화재자료 지정을 해제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장지연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후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2011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1986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시 왕산에 천주교 서문동성당에서 위암장지연선생기념비(韋庵張志淵先生紀念碑)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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