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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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城書院 |
영어공식명칭 | Okseongseowon |
이칭/별칭 | 수양서당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옥성수자동길 40-11[신상리 129]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재현 |
이전 시기/일시 | 1710년 - 옥성서원 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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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 - 옥성서원 철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7년 - 옥성서원 복설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31년 - 수양서당에서 옥성서원으로 개칭 |
현 소재지 | 옥성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옥성수자동길 40-11[신상리 129] |
성격 | 서원 |
양식 | 팔작지붕[명륜당]|맞배지붕[경현사] |
정면 칸수 | 4칸[명륜당]|3칸[경현사] |
측면 칸수 | 2칸[명륜당]|1칸[경현사] |
소유자 | 옥성단 |
관리자 | 옥성단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옥성서원(玉成書院)은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1312~1362],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 후계(后溪) 김범(金範)[1512~1566] 및 월간(月澗) 이전(李㙉)[1558~1648]·창석(蒼石) 이준(李埈)[1560~1635] 형제를 제향한 서원이다. 김득배는 고려 말에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신잠은 상주목사로 재임할 당시 상주 지역에 18개의 서당을 세워 유학을 진흥시켰다. 김범은 16세기 중반 상주 지역 유학의 학맥을 이은 학자이다. 이전과 이준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 등과 함께 17세기 초 상주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위치]
옥성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옥성수자동길 40-11[신상리 129]에 있다.
[변천]
신잠은 1551년(명종 6)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상주 지역에 18개소의 서당을 창건하였다.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구서리 옥봉(玉峯) 아래에 수양서당(首陽書堂)을 세우고 청리에 수선서당을 세웠으며, 공성에 용문서당(龍門書堂) 등을 세웠다. 1631년(인조 9) 이준의 주도하에 상주 지역 유림의 공의로 서당들 가운데 수양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켜 김득배와 신잠을 제향하였다. 1636년 상주 지역 유학에 기여한 김범을 추향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하다가 1647년 김범과 이준을 함께 추향하여 네 명의 인물을 모시게 되었다. 1648년(인조 26) 홍수로 산사태가 일어나 서원 건물이 무너지자 근방 청리면 청하리의 수선서당(修善書堂)에 임시로 위패를 모시고 있다가 1710년(숙종 36) 현재 위치에서 2㎞ 가량 떨어진 외남면 신상리의 진등 마루에 서원을 이건하였다. 이때 이전을 추향하여 김득배·신잠·김범·이전·이준 다섯 명을 제향하였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훼철되었고, 단소(壇所)를 설치하여 향사만 이어 오다가 1977년 지역 사람의 논의로 복설하였다.
[형태]
현재 옥성서원은 1977년 복설 당시 모습으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사당인 경현사(景賢祠)가 남아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경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서원훼철령 이전의 서원 구조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황]
옥성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를 지낸다.
[의의와 평가]
옥성서원은 경상북도 상주시 남부 지역인 외남·청리·공성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서원으로 지역 사족들의 거점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주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옥성서원에서 많은 통문(通文)이 작성되었다. 상주 내에서는 도남서원(道南書院)과 함께 남인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서원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