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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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華山 白華巖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백화산 백화암」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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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보문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
성격 | 이인담 |
주요 등장 인물 | 문유채|문유채의 아내|조정만 |
모티프 유형 | 이인담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의 백화산 아래 보문에 있었다는 백화암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백화산 백화암(白華山 白華巖)」은 백화암에 살았다는 문유채(文有采)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문유채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였다. 이후 누명을 벗었으나 정착하지 않고 이인(異人)으로 살았다고 한다. 문유채는 3년간 시묘를 할 정도로 효성이 깊은 데 반하여 문유채의 아내는 남의 아이를 낳아 기를 정도였다. 부부 사이의 윤리적 갈등이 깊은 탓에 결국 아내는 죽고 문유채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삶을 택하였다는 이인담의 한 형태를 보여 준다.
[채록/수집 상황]
「백화산 백화암」은 2010년 11월 30일에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상주 백화산 아래 보문에 있는 백화암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상주 사람 문유채는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살았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부인 황씨가 정절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남자의 딸을 낳았으므로 쫓아냈다. 이에 황씨 집안에서 문유채가 아내를 죽였다고 여겨 고발하였고, 사건이 해결되지 않아 문유채는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조정만(趙正萬)[1656~1739]이 상주목사로 와서 전말을 알고는 황씨를 찾아 죽인 뒤에야 문유채가 석방되었다. 문유채는 출가하여 지산사에 살았는데 벽곡(辟穀)[오곡을 먹지 않는 것]을 행하여 열흘씩 안 먹기도 하고 한꺼번에 대여섯 되를 먹기도 하였다. 문유채는 하루에 400리에서 500리를 걸을 수 있고 얇은 옷 하나로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경술년 겨울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있을 때는 큰 눈이 왔는데도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찬 데서 잤다. 신광사에 있는 사흘 동안 밥을 먹지 않다가 중들이 걱정하자 쌀 한 말의 밥을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다. 문유채가 신광사를 떠날 때 걸음이 빠른 중이 뒤를 밟아 비로소 문유채임을 알았다고 한다.
문유채는 어느 해 겨울에 산꼭대기의 폐사에 들어갔는데, 모두들 문유채가 동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듬해 봄에 보니 굶주린 빛도 없이 암자에 앉아 불경을 읊고 있었다. 혹 누군가가 불경에 대하여 논하려고 하면 자신은 다만 읽을 뿐 뜻을 알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문유채는 백화암에서 살다가 마가암에서 죽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백화산 백화암」의 주요 모티프는 먹지 않아도 죽지 않고 추워도 얼어죽지 않는 이인담이다. 하루에 400리에서 500리를 걸을 수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지도 않으며 남들과 불경을 논하지도 않은 것에서 세상과 등진 모습을 보인다. 정절을 지키지 않은 아내로 인하여 살인의 누명을 쓰기도 하고, 억울한 옥살이 후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며 산 이인의 삶을 보여 준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문유채는 아버지가 죽자 3년 시묘를 할 정도로 유교 윤리에 철저하였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아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의 딸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당연히 문유채로서는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내의 부정이 망신스러워 조용히 쫓아내었지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후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사는 와중에도 추위와 배고픔에서도 자유로운 이인의 능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유채에 대한 민중의 애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