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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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송량 일가의 충효열」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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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명 | 송량 일가 정려문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산109 |
관련 지명 | 효곡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용신2길 51-23[용신리 324] |
성격 | 인물 전설|사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송량|송이회|송이필|송량의 두 딸 |
모티프 유형 | 효자|절부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송량 일가의 정려각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송량 일가의 충효열」은 효자와 절부로 이름난 우곡(愚谷) 송량(宋亮)[1534~1618]의 아들과 딸들에 대한 인물 전설이면서 송량 일가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에 대한 사물 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송량 일가의 충효열」은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에 우곡 송량 일가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정려각에는 두 개의 정려가 걸려 있다. 왼쪽이 “효자고처사여산송이회지려(孝子故處士礪山宋以誨之閭)”이고 오른쪽이 “절부고사인노경건처유인여산송씨지려(節婦故士人盧景健妻儒人礪山宋氏之閭)”이다. 정려각에 모셔진 효자와 절부는 충효열(忠孝烈)로 이름난 송량 일가의 자녀들이다.
송량은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며,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과 한성참군(漢城參軍)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또 낙동강(洛東江) 가 오현사(五賢祠)[도남서원] 창건의 도청직을 맡았으며, 우곡정사(愚谷精舍)를 세워 백성 교화에 힘썼다.
송량의 아들 송이회(宋以誨)는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람들이 모두 피란을 갈 때도 혼자 향교로 달려가서 오성(五聖)[공자(孔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위패를 깨끗한 곳에 묻은 후 부모를 모시고 백화산(白華山)으로 피하였다. 어느 날 저녁 왜구가 몰려와서 부모를 해치려고 하자 송이회는 앞을 막아서며 왜구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애석하게 최후를 맞았다. 이때 송이회의 아우 송이필(宋以弼)도 함께 참변을 당하였다. 두 아들의 희생으로 부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송량의 딸이 노경건(盧景鍵)에게 시집을 갔는데, 노경건도 왜적한테 피해를 입었다. 송씨가 “내 비록 남편과 함께 죽을지언정 너희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꾸짖자, 왜구가 화가 나서 송씨의 오른팔을 베어 냈지만 송씨는 변절하지 않고 항거하다가 죽었다. 한 마을에서 같은 날 참변을 당한 것이다.
한 집안에 효와 열의 두 절개가 있음을 모두가 칭찬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고을 사람들이 송씨 일가의 사연을 적어 감사에게 올렸다. 1729년(영조 5) 가을에 효곡재사(孝谷齋舍) 가까이 정려를 세웠다.
조선 후기의 문신 정종로(鄭宗魯)[1738~1816]는 비문에 “성현을 위하여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는 것은 정의요, 부모를 위하여 힘을 다하다가 죽는 것은 효이다. 효와 의는 죽더라도 좋은 일이나 홀로 뒤를 이을 자손이 없으니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렵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이증엽(李增曄)[1674~1742]도 정려문에 “이회의 여동생 노실부인(盧室婦人)이 오빠인 이회와 같은 날에 죽었다. 같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니 한 집에 두 가지 절개가 있음이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100년이 지난 뒤라도 이 앞을 지나는 사람은 절하며 이 아버지에 이 아들과 이 딸이 있다는 것을 새길지어다”라고 써 놓았다.
송량의 막내딸은 정이괄(鄭而适)에게 시집을 갔는데, 왜구를 피하여 호남 지방의 장수현(長水縣)에 들어가 살았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시어머니가 죽자 시아버지 곁에 장사 지냈다. 그런 뒤 “내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명이 박한 이 한 몸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통곡하면서 목을 매 죽었다.
송량은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에 충성하고 송이회, 송이필 형제는 죽음으로써 부모를 살린 효행을 실천하였다. 딸 노실부인은 정절을 지켰으며, 정실부인은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모시다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으니 한 집안이 충효열을 다하였다. 아버지와 아들딸 다섯 사람이 행한 이와 같은 도리는 참으로 귀하고 드문 일이다.
[모티프 분석]
「송량 일가의 충효열」의 주요 모티프는 ‘효자’와 ‘절부’이다. 송량의 두 아들은 왜구에 맞서 부모를 구하였으나 자신들은 죽음을 맞았고, 송량의 두 딸들은 왜구에 저항하고 남편과 시부모를 따라 순절하였다. 충효열은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덕목이었으므로 충효열을 행한 인물 또한 상찬의 대상이 되었다. 송량 일가는 송량이 충을, 아들이 효를, 딸이 열을 행하여 한 집안에서 충효열을 모두 실천한 보기 드문 경우이다. 설화로 전승되지만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여서 울림이 더욱 크다. 일반적으로 효행담은 지극한 효성에 행복한 결말이라는 보상이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송량 일가의 충효열」은 효자와 절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 주고 있어 전설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