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385
한자 忠烈祠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11월 30일 - 「충렬사」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98년 - 「충렬사」 경상북도 상주시 무양동에 충렬사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9월 23일 -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관련 지명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 경상북도 상주시 경상대로 3123[만산동 699]지도보기
성격 사물 전설|인물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경류|종|형|어머니
모티프 유형 충성|효성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충렬사 및 이경류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충렬사(忠烈祠)」임진왜란(壬辰倭亂)북천(北川) 전투에서 전사한 군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충렬사에 대한 사물 전설이다. 후반부는 북천 전투에서 전사한 이경류(李慶流)[1564~1592]의 충심과 효성을 보여 주는 일화를 담은 인물 전설이다. 충렬사가 건립되어 있는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는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채록/수집 상황]

「충렬사」는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7,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와서 상주 북천 지역을 기습 공격하였다. 조정에서 급파한 경상도 순변사 이일(李鎰)[1538~1601]은 중앙에서 데려온 60여 명의 병력과 피난한 상주 백성을 급히 모아 800여 명의 향병을 조직하였다. 1592년 4월 25일, 향병은 상주 북천에서 왜적에 맞서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이일은 도망가고, 중앙에서 내려온 종사관 교리 윤섬(尹暹)[1561~1592], 병조좌랑 이경류, 종사관 박호(朴箎)[1567~1592], 상주 판관 권길(權吉)[?~1592], 사근도(沙斤道) 찰방 김종무(金宗武)[1548~1592], 호장 박걸(朴傑)[?~1592], 의병장 김준신(金俊臣)[1561~1592] 등은 많은 향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2년 5월 17일 의병장 김일북천에서 전사하였다.

1698년(숙종 24) 경상북도 상주시 무양동충렬사를 창건하여 판관 권길, 통제사 정기룡(鄭起龍)[1562~1622], 찰방 김종무, 한림 전극항(全克恒)[1590~1636]을 봉향하고, 호장 박걸을 방사에 종향하였다. 그 후 충렬사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철거되면서, 위패는 후손들이 모셔 가고 단소(壇所)만 남아 ‘충렬단’이 되고 김종무 1위만 향사하였다. 1988년 상주 임란북천전적지가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1993년 충렬사경상북도 상주시 만산동 상주 임란북천전적지에 다시 건립하였다.

북천 전투에서 전사한 이경류의 충효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이경류가 병조좌랑이었을 때 계(啓)가 잘못 내려져서 둘째 형 대신 이경류가 변기출의 종사관으로 가게 되었다. 전세가 불리하자 변기출은 도망가 버리고, 군중은 우두머리 장수가 없어 크게 혼란스러워하였다. 이경류는 상주에서 이일이 혼자 싸운다는 말을 듣고 윤섬, 박호와 함께 가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하여 군사의 무리가 함몰하고 윤섬과 박호가 전사하였다.

이경류가 홀로 진 밖으로 나오니 말을 잡고 기다리던 종이 전세가 불리하니 속히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이경류는 웃으면서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내 어찌 목숨을 아끼겠는가?” 하고는, 곧 붓을 꺼내 부모와 형에게 고별의 글을 쓴 뒤 종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적진을 향하려 하자 종이 껴안고 울며 놓지 않았다. 이경류가 “네 정성이 또한 아름답구나. 내 응당 네 말을 들으리라. 그러나 내가 심히 배가 고프니 네가 밥을 좀 얻어 오너라”라고 하였다. 종이 이경류의 말을 믿고 민가에 가서 밥을 얻어 오니 이경류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이경류는 종을 보내고 곧장 몸을 돌려 적진에 뛰어들었다. 용맹하게 적과 싸웠으나 상주 북문 밖 들판에서 전사하였다. 그때 이경류의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다.

이경류의 종이 말을 끌고 와 비보를 전하니 온 집안이 슬퍼하고 이경류가 편지를 쓴 날을 기일로 삼아서 제사를 지냈다. 곧이어 종도 병으로 죽고 말 또한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이경류의 장례를 치를 때 무덤 아래에 종과 말도 함께 묻었다. 그 후 상주 사림에서 단을 쌓고 제사의 예를 치렀다.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친필로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고 써 내려 북반에 각을 세우게 하고, 삼종사관(三從士官)을 함께 모셔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경류는 죽은 후에도 이승을 떠나지 않고 매일 밤 집에 들렀다고 한다. 날마다 해가 진 뒤에 와서 닭이 울면 돌아갔다. 음성이나 웃는 모습이 살았을 때와 같았고 부인 조씨(趙氏)와 말을 주고받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부인이 이경류에게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장차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였다. 이경류는 추연히 “허다한 백골이 쌓인 가운데에서 어찌 구별을 할 수 있겠소?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오. 또 내 백골이 묻힌 곳은 해가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경류는 소상(小祥)[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후에는 이틀에 한 번씩 찾아오다가 대상(大祥)[사람이 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맞아서는 앞으로는 오지 않겠다면서 부인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네 살 된 아들을 어루만지며 아들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고 하고는 영영 떠났다. 20여 년 후, 광해군(光海君)[1575~1641] 대에 이경류의 아들이 급제하여 사당에 참례할 때 공중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있어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경류의 어머니는 평소에 조갈증(燥渴症)이 있어 귤을 먹으면 병이 낫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여름이라 귤을 구할 길이 없었다. 며칠 후, 공중으로부터 “형님, 형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형이 뜰을 내려다보니 구름 가운데에서 이경류가 귤 세 개를 던지며 “어머님이 귤을 생각하시기에 제가 중국 동정호에 가서 얻어 왔습니다. 드리도록 하십시오” 하고는 사라졌다. 형이 귤을 받아 어머니에게 드리니 어머니의 병환이 곧 나았다.

이경류의 제삿날을 당하여 유식(侑食)[제주(祭主)가 술을 다 부은 다음 숟가락을 제삿밥 가운데에 꽂고 젓가락 끝이 동쪽으로 가게 놓은 다음 재배하는 행위]을 할 때면 반드시 숟가락과 젓가락질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제사에는 수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모두 이상하게 여겼는데, 제사가 끝난 후 바깥사랑에서 갑자기 종을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류가 살아 있을 때의 음성이었다. “귀신의 길에는 사람의 털을 가장 꺼리거늘 너는 어찌하여 정성껏 살피지 아니하였느냐?” 엄하게 나무라고 다음부터는 지극히 조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집안사람들이 놀라 떡 그릇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머리카락이 나왔다. 이후로 집안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충렬사」의 주요 모티프는 ‘충성’과 ‘효성’이다. 「충렬사」의 전반부는 임진왜란 때 벌어진 북천 전투의 경과를 통하여 전투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인물들의 충성심을 보여 준다. 후반부는 북천 전투에서 전사한 이경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경류의 충성과 효성을 보여 주는 일화가 모두 담겨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실제 행적에 비현실적인 일화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경류의 충성과 효성을 높이 사는 지역 전승자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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