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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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임진왜란 초기 순변사 이일이 지휘하는 중앙군과 경상북도 상주의 지방군이 연합하여 중로를 따라 북상하는 왜군에 대응하여 맞서 싸운 전투.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란 발발 이후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경상북도 상주로 급히 파견하였다.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이일은 군관과 궁수 60여 명만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급속히 진군하는 왜군의 위세에 눌려 관군은 뿔뿔히 흩어진 상태였다. 600여 명의 상주 관군을 모았던 이일은 1592년 4월 24일부터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592년 4월 25일 아침 북천 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의 급습으로 조선군은 패하였다. 순변사 이일과 조방장 변기(邊璣)는 도주하였지만 진영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전사하였다.
경상북도 상주의 유림들은 전쟁 종료 이후 북천전투에서 순절하였던 종사관 윤섬(尹暹), 박지(朴篪), 이경류(李慶流)와 상주판관 권길(權吉) 그리고 사근도 찰방 김종무(金宗武), 호장 박걸(朴傑), 의병장 김일(金鎰), 김준신(金俊臣) 등에 대한 포증(褒贈)과 추숭 사업을 실시하였다.
종사관 윤섬, 박지, 이경류는 광해군 대에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되었고, 정조 대에는 경상북도 상주의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제향되었다. 상주판관 권길은 사의비(死義碑)가 건립되고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상산지(商山誌)』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읍지 및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등에 행적이 소개되었다. 아울러 호장 박걸의 행적도 권길의 사의비에 부기하고, 충렬사 옆에 별도의 방을 만들어 향리들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상산지』를 중간하면서 박걸의 행적을 수록하였다.
찰방 김종무는 경종 대에 이르러 충렬사에 추향(追享)되었고, 『영남인물고』에도 행적이 수록되었다. 이 외에도 의병장 김준신과 김일은 정조 대에 충신의사단에 제향되었는데, 이때 종사관 윤섬, 박지, 이경류도 함께 제향되었다. 나아가 충의단 아래에 이졸단(吏卒壇)과 장사단(將士壇)을 따로 마련하여 임진왜란 당시 순절인들을 추모하였다. 이로써 경상북도 상주에는 충렬사와 충신의사단이 임진왜란 당시 순절인을 제향하는 대표적 추모 시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북천전투의 전개 양상]
1592년 4월 14일 왜군의 상륙 소식이 경상북도 상주에 전달되었다. 1592년 4월 15일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는 경상도 군현에 분군법(分軍法)을 발령하여 대구도호부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고, 1592년 4월 16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함창현감과 함께 군사 수천 명을 동원하여 크게 세 개 부대로 편성하였다. 제1군은 경상북도 상주의 솔영장 김준신이 인솔하여 앞서 가고, 제2군은 상주목사와 함창현감이 이끌었다. 1592년 4월 19일경 제2군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인근에 이르렀을 때, 피난민을 왜군으로 오인하여 궤산하였다. 제1군 역시 1592년 4월 20일에 대구도호부 인근 금호강 변에서 피난민을 보고 놀라 와해되었다. 한편 판관 권길이 이끄는 제3군은 경상북도 고령군까지 진출하였으나, 왜군을 만나기도 전에 궤산하였다. 그리하여 상주목사, 함창현감, 솔영장, 판관 등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경상북도 상주로 돌아왔다. 당시 상주목사 김해는 읍민들에게 피난을 명령한 다음 잠적하였다. 1592년 4월 21일 상주로 돌아온 판관 권길은 호장 박걸과 함께 비어 있는 상주읍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편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경상도로 급파하였다. 1592년 4월 23일 상주성에 도착한 이일은 급하게 내려오면서 별장에게 군사를 모아 내려오도록 하고, 자신은 군관과 궁수 60여 명만 이끌고 내려왔다. 원래 이일은 대구도호부로 내려가 경상도군을 이끌고 왜군에 맞서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구도호부에 집결한 경상도 각 군현의 군사들은 왜군의 빠른 북상으로 도산(逃散)한 상태였다. 이로 인하여 이일이 지나왔던 경상북도 문경·함창·상주 등지도 군사가 도주한 상태였다. 1592년 4월 23일 경상북도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대구도호부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빈 읍성을 지키고 있는 판관 권길을 독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군관을 시켜서도 피난 중인 읍민들을 설득하게 하였다. 성안의 곡식을 푸는 등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1592년 4월 24일에 총 800~900명 정도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은 병력은 훈련 받은 군사들이 아니라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인근 경상북도 함창현에서도 일부 군인이 합류하였으며, 사근도 찰방 김종무가 끌고 온 역마와 역졸도 합류하였다. 이날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서 온 사람이 왜군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고하였으나, 이일은 근거없는 소문을 내어 군중을 경동케 한다고 옥에 가두었다.
1592년 4월 25일 이른 아침에는 조방장 변기가 이끄는 부대가 도착하였다. 조령(鳥嶺)을 방어하기 위해 내려오다가 충청북도 청주에서 급보를 받고 순변사 이일을 돕기 위해 밤새 달려온 것이다. 이일은 북천 북안(北岸)가에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이일의 옆에는 종사관 윤섬과 박지, 상주판관 권길, 사근도 찰방 김종무 등이 도열하였으며, 조방장 변기와 종사관 이경류도 있었다.
군사 훈련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북천 남쪽의 냇가 숲 속에서 훈련장을 염탐하는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처형된 개령 사람을 떠올리며 아무도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그때 상주읍성 쪽에서 연기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이일은 군관 박정호(朴挺豪)를 시켜 살펴보게 하였다. 왜군은 북천 다리 밑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박정호를 죽이고, 머리를 베어 가 버렸다. 이를 보던 조선군은 크게 기가 꺾였다. 그 직후 왜군의 대대적인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본진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뉜 왜군이 포위하여 밀려들었고, 조선군 후방으로는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대가 이미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조선군은 순변사 이일의 부대, 조방장 변기 부대, 사근도 찰방 김종무 부대, 판관 권길의 상주·함창 지방군으로 모두 800~900명 정도였다. 반면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1만 8000여 명이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데다가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은 우왕좌왕하며 대열이 붕괴되었다. 이일이 급히 대오를 수습하여 궁수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였지만 적들에게 닫지 못하였다. 이어서 근접전이 벌어지자 진영은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순변사 이일은 조방장 변기와 함께 위기를 모면하고자 말머리를 돌려 도망하였다. 이처럼 북천전투는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궤멸한 전투였다. 그러나 조선의 중앙군이 처음으로 왜군과 조우한 전투이자 부산의 전투 이래로 왜군에 대항하여 처음으로 싸운 전투였다는 점에서 북천전투의 의의가 있다.
[전사자에 대한 현창 사업]
북천전투는 조선의 중앙군이 궤멸적 패배를 하였다는 점, 주장인 순변사 이일과 조방장 변기가 도주하였다는 점, 상주목사 김해가 소백산맥 일대로 도주하였다는 점에서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전투였다. 그러나 국가 운영의 측면에서 볼 때 경상북도 상주민들이 북천전투에서 보여 준 충성심과 희생 정신은 부각시킬 요소가 충분하였다. 이준은 경상북도 상주민 가운데 왜군에 붙은 자가 한 명도 없음을 애써 강조하였고, 조정에서는 복호(復戶)의 조처를 취하여 상주민의 충성심을 치하하였다.
임진왜란이 마무리된 직후인 1601년(선조 34) 윤섬, 박지, 이경류 등 세 종사관에 대한 포숭(褒崇) 논의가 먼저 시작되었다. 이는 윤섬의 부인 원씨가 올린 탄원서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윤섬 등의 충절은 애도하지만 포증은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1617년(광해군 9)에 들어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편찬할 때 왕의 특명으로 윤섬, 박지, 이경류 등 세 종사관이 포함되었다.
한편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도 현창 사업이 진행되었다. 경상북도 상주의 사족들은 판관 권길의 순절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포증을 요청하였다. 이준(李埈)은 1612년(광해군 4) 권길의 사의비를 찬술하여 북천전투에서 보인 권길의 행적을 기렸으며, 호장 박걸의 의리에 대하여서도 특별히 기록하였다. 또한 1617년(광해군 9) 간행된 『상산지』 명환(名宦) 조에 판관 권길을 수록하고, 사의비가 세워진 사실을 특기하였다. 1749년(영조 25) 권상일(權相一)이 증보한 『상산지』가 간행되었다. 증보한 『상산지』에는 충렬사가 문묘조에 새롭게 수록되었고, 박걸이 충절(忠節) 조에 간단한 설명과 함께 처음 수록되었다. 이후 1757년(영조 33)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충렬사와 권길, 박걸이 수록되었다. 1832년(순조 3)의 『상주읍지』에는 충의단, 즉 충신의사단과 김준신, 김일이 추가되었다. 이 외에도 정조 대에 편찬된 『영남인물고』에는 권길과 김종무의 북천전투와 관련한 내용이 수록되었다.
1698년(숙종 24) 경상북도 상주의 유림은 충렬사를 건립하여 북천전투 순절자인 권길, 상주성을 탈환한 정기룡을 제향하였다. 1708년(숙종 34)에는 호장 박걸을 사당 옆에 따로 방을 내어 위패를 봉안하고, 향리들로 하여금 향사를 지내도록 했다. 1721년(경종 1)에는 김종무를 충렬사에 추향하였다. 그리하여 충렬사는 경상북도 상주의 대표적인 임진왜란 관련 사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외에도 1738년(영조 14) 참봉 성이한(成爾漢)에 의하여 북천 인근에 종사관 윤섬, 박지, 이경류와 경상북도 상주 출신 전사자 김준신 등 네 사람을 제향하는 사당인 증연사(甑淵祠)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증연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훼철되고, 1790년(정조 14) 성이한의 손자인 성최열(成最烈)이 사우가 있던 자리에 단(壇)을 쌓고 ‘경절단(景節壇)’이라 칭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계기로 사당 건립이 다시 진행되었다. 조정에서는 충렬사와 합사할 것을 권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792년(정조 16) 상주 유학 맹진태 등이 사당을 세울 것을 다시 청하였으나 서원 신설 금령에 따라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정조는 독립된 사당 대신 충신의사단을 세우는 묘안을 제시함으로써 금령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조는 상주목으로 하여금 춘추 향사에 술과 제물을 제공하도록 하고, 경상도 관찰사로 하여금 순행길에 헌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의병장 김일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교서를 내린 것을 계기로 충신의사단비를 세우고 교서의 내용을 비문에 새겼다. 충의단 아래에는 이졸단과 장사단을 따로 마련하였다. 1825년(순조 25) 국왕은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퇴락한 비각을 개수하도록 하고,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4주갑을 맞이하여 충신의사단에 치제(致祭)하였다. 1892년(고종 29)에도 치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