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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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공갈못」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99-11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2010년 11월 30일 - 「공갈못 전설」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공갈못」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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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9월 29일 - 상주 공검지 경상북도 기념물 제121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상주 공검지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
관련 지명 | 상주 공검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99-112 |
성격 | 사물 전설|지역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공갈|승려|김씨|황룡|청룡|백룡 |
모티프 유형 | 인신 공희|용 싸움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상주 공검지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공갈못 전설」은 상주시에 있는 공갈못[공검지(恭儉池)]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이다. 공갈못의 축조 과정에 얽힌 이야기, 공갈못에 살면서 물을 관장하는 용에 관한 이야기, 공갈못의 크기와 명성에 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공갈못 전설」은 공갈못에 대한 사물 전설이면서 상주 지역에서 주로 전승되는 지역 전설이다.
「공갈못 전설」의 배경이 되는 상주 공검지는 1997년 9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채록/수집 상황]
「공갈못 전설」은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공갈못」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1. 매아 설화(埋兒 說話)
옛날 공갈못을 만들 때 사방에 물이 하도 많아 둑을 쌓으면 자꾸 터졌다. 그래서 ‘공갈’이라는 아이를 못 둑에 묻고 쌓았더니 둑이 무너지지 않고 못을 이루어 ‘공갈못’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다는 내용은 홍귀달(洪貴達)[1438~1504]의 「명삼정기(名三亭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공갈을 묻은 연유에 대하여서는, 다른 집들은 모두 제방 쌓는 부역을 할 수 있었는데 공갈의 집은 할 수 없어 대신 아이를 내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2. 인주 설화(人柱 說話)
옛날에 한 중이 공갈못 주변 마을에 시주를 받으러 나갔다. 그러나 못의 물이 말라 흉년이 든 마을에서 시주를 할 만한 집은 없었다. 더구나 마을에는 어린아이들만 남아서 집을 보고 있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갈못 둑 쌓는 일에 총동원되었다. 공사 현장에 간 중은 굶주린 가운데에서도 둑 쌓는 일에 동원된 백성들의 참상을 보고 안타까움에 목이 메었다. 공갈못은 둑에 비하여 물이 많아 걸핏하면 못 둑이 터져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중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사람을 못 둑 복판에 세우고 쌓으면 못 둑이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중은 합장을 거듭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사람을 묻는 일은 애당초 될 일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 중이 다시 찾아왔다. 중은 쌓고 있는 못 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둑을 쌓고 있는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나를 기둥으로 삼아 못 둑을 쌓으시오”라고 하였다. “스님, 안 됩니다. 죄를 지으면서까지 못 둑을 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중을 움직이려고 하였으나 중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을 묻지 않으면 못 둑은 영영 완성되지 못한다”라는 중의 간곡한 말을 듣고 나서 눈시울을 붉힌 채 중을 기둥 삼아 둑을 쌓았다. 둑이 완성된 뒤로 못 둑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에도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되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중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거룩한 살신의 보시를 행한 중은 그야말로 부처의 화신이었다.
3. 쌍룡연투(雙龍戀鬪)
상주에 사는 김씨가 경주에 갔다 오는 길에 아리따운 미녀를 만나 길동무가 되었다. 김씨는 처녀가 너무 아름다워 불길한 예감에 공포마저 느낄 정도였다. 혹시 여우가 둔갑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곁눈질을 하였지만 이상한 낌새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날이 저물어 대구가 가까운 오명원(午鳴院)에 도착하였다. 처녀가 갑자기 물을 이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물을 방 안에 쏟으며 황룡으로 변하였다.
얼마 뒤 황룡은 다시 처녀로 변신하여 말하였다. “나는 경주 용담에 있는 용녀인데, 지금 상주 공갈못에 사는 수룡에게 시집을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공갈못에 가면 못에 있는 암룡과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당신은 나를 도와주십시오.” 김씨는 놀라서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용녀가 말하기를, “모 월 모 시에 공갈못에서 세 용이 싸움을 할 것인데, 청룡은 수룡, 즉 나의 남편이 될 용이요, 황룡은 나요. 백룡은 나의 출가를 방해하는 암룡이니, 그 백룡을 죽여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김씨는 얼떨결에 용녀와 약속을 하였다.
싸움이 있을 날이 되자 김씨는 공갈못으로 갔다. 과연 세 마리 용이 뒤엉켜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몸이 부딪치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 찼다. 김씨는 급히 칼을 빼어 백룡을 내리쳤으나 당황한 나머지 잘못하여 청룡의 허리를 자르고 말았다. 청룡이 피를 쏟으며 물속으로 잠기자 황룡이 나타났다. 백룡을 죽여 달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남편을 죽였느냐며 김씨를 몹시 원망하였다. 그러고는 김씨에게 자기를 과부로 만들었으니 비록 원수라도 자기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김씨는 황룡에게 집에 가서 부모 형제, 처자와 작별하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갈못을 떠났다.
집으로 가던 도중 김씨는 갑자기 열이 오르고 전신이 아팠다. 겨우 집에는 도착하였지만 이튿날 죽고 말았다. 김씨의 집안사람들이 크게 놀라 무당에게 물으니 용신의 장난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못가에 단을 쌓고 무당에게 굿을 하게 하였다. 그때 못 속에서 황룡이 나타나더니, “나는 당신이 오기를 고대하였는데 이제야 오는구려” 하며 흡사 사람을 껴안듯 하더니 다시 못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 백룡을 묻은 국사봉(國祀峰)
상주 함창 공갈못에 사는 황룡[수컷]이 경주 안압지(雁鴨池)에 사는 백룡[암컷]에게 장가를 갔다. 경주에 가서 장가를 든 공갈못의 황룡이 백룡을 데리고 돌아오던 중 신녕[지금의 영천]의 못에서 잠시 쉬어 가게 되었다. 이때 신녕의 못에 살던 청룡[암컷]이 황룡에게 마음을 빼앗겨 결국 공갈못까지 따라와 세 용이 함께 살았다. 이때부터 백룡과 청룡은 황룡을 두고 자주 사랑싸움을 하였다.
또 싸움이 벌어진 어느 날, 황룡이 청룡을 없애려고 칼을 내려친다는 것이 그만 사랑하는 아내 백룡을 죽이고 말았다. 원통한 황룡은 백룡의 시체를 국사봉에 묻고 정성껏 장사를 치렀다. 그 후부터 백룡은 가뭄해와 수해를 관장하는 신이 되었고, 향토민은 국사봉에서 가뭄이나 홍수 때 제를 올려 해가 없기를 빌었다고 한다.
5. 지킴이 건드려 메워진 공갈못
어느 해 가뭄이 심하여 공갈못 물이 다 마르고 한복판에만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모든 물고기가 다 중앙에 모여 있어서 사람들이 그물을 쳐서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걷어 올린 그물에 누런 송아지 같은 형상의 알 수 없는 물짐승이 잡혔다. 워낙 커서 들고 가지도 못하고 겨우 끌고 갈 지경이었다. 그물로 잡은 짐승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던 차에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쳤다.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못물이 불어나 가득하여지면서 잡아 두었던 물짐승을 그대로 못에 두었다. 이 후 공갈못이 차츰 흙으로 메워지기 시작하여 지금처럼 못이 모두 논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공갈못이 메워진 이유는 물짐승, 즉 공갈못의 지킴이를 사람들이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6. 용갈이[龍耕] 이야기
겨울이 되어 공갈못에 얼음이 얼면 얼음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갈라 터진다. 사람들은 용이 얼음 위에 밭갈이를 하여 얼음이 갈라 터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겨울에 공갈못 얼음이 갈라지는 것을 ‘용갈이[龍耕]’라고 하였다. 용갈이 형상을 보고 다가오는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는 이야기도 옛날부터 전하여 내려온다. 얼음이 갈라져 동서로 뻗치면 풍년이 들고 남북으로 뻗치면 흉년이 든다고 하기도 하고, 얼음이 잘고 고르게 갈라지면 풍년이 들고 굵고 성글게 갈라지면 흉년이 든다고 하기도 하였다.
7. 우경 설화(牛耕 說話)
음력 정월 14일, 겨울밤인데도 못 근처에 있는 소들은 땀을 흘린다. 소들이 밤을 새워 공갈못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 한다.
8. 용을 잡은 이여송(李如松)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이여송이 공갈못을 지나다가 제방을 끊고 발을 대어 잉어와 용을 잡아먹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호반의 북쪽 한 지점[경북선 철교가 놓인 자리]을 ‘이여송의 발 자리’라 부른다.
9. 기타
공갈못은 볶은 콩 한 되를 하나씩 먹으며 못을 돌아도 콩이 모자라고, 볶은 콩 서 되를 하나씩 먹으며 말을 타고 못을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고 한다. 그만큼 공갈못이 크다는 말이다. 또 죽어서 저승에 가도 “상주 함창 공갈못을 구경하고 왔느냐?”라고 물어서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쫓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리고 공갈못에는 뱀과 거머리가 없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공갈못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인신 공희(人身 供犧)’와 ‘용 싸움’이다. 「공갈못 전설」은 크게 몇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신 공희’ 이야기와 ‘용 싸움’ 이야기이다. 인신 공희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인간이 숭배와 복종의 의미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공갈못 전설」 중에서 ‘매아 설화’와 ‘인주 설화’는 물의 흐름을 거스르는 둑을 쌓는 과정에서 어린아이나 중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이야기이다. ‘쌍룡연투’와 ‘백룡을 묻은 국사봉’은 ‘용 싸움’ 이야기의 한 유형이다. 사람이 못에 사는 용들의 싸움에 끼어들어 죽거나 용 싸움에서 진 용이 물을 관장하는 신이 되는 이야기이다. ‘지킴이 건드려 메워진 공갈못’에는 용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물짐승이라고 묘사되는 존재가 못을 지키는 용신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공갈못의 엄청난 크기와 명성에 대한 이야기, 공갈못의 신성함과 영험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농경 사회에서 공갈못이라는 큰 저수지가 지역민에게 가지는 의미를 말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