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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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淵嶽文會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목주 |
[정의]
1622년에 경상북도 상주 선비들이 연악에서 문회를 열고 지은 시문을 책으로 엮은 시집.
[개설]
『연악문회록(淵嶽文會錄)』은 1622년 5월 25일부터 5일간 연악(淵嶽)[갑장산(甲長山)]에 있는 연악서재(淵嶽書齋)[연악서당(淵嶽書堂), 현재는 연악서원(淵嶽書院)]에서 당시 상주목사였던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1572~1631]과 상주 선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창석(蒼石) 이준(李埈)[1560~1635] 등을 비롯한 15명이 가진 문회의 시문을 한 책으로 엮은 문회록이다. 상주에 현존하는 최초의 공동 시집이다.
[구성]
『연악문회록』은 목판본(木版本)으로 총 65면인데, 한 면은 5~6행이며, 1행은 9~11자이다. 표제는 ‘연악문회록’이나 방명록의 제목은 ‘임술오월이십오일연악문회록(壬戌五月二十五日淵嶽文會錄)’이다. 처음에는 문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의 친필(親筆)을 그대로 연악서재에 보관하여 오다가 1638년에 도천(道川) 황정간(黃廷幹)[1558~1642, 뒤에 이름을 황시간(黃時幹)으로 바꿈]이 「제연악승유록후(題淵嶽勝遊錄後)」를 써서 재장정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고, 1702년 연악서재가 연악서원으로 승격된 뒤에도 줄곧 연악서원에 보관하여 왔다. 이후 300년이 지난 1926년에 김상윤(金相允)이 목판본으로 발행하였다.
『연악문회록』은 이준의 「서(序)」와 참석자 명단, 「연악연구(淵嶽聯句)」 19운(韻) 38구(句)를 비롯하여 ‘군행망후선(群行忘後先) 붕식기구검(朋息棄拘檢)’이라는 말의 각 글자를 운으로 삼아 10명이 율시(律詩) 내지 배율(排律)을 지었고, 조찬한이 문회의 총체적인 분위기를 오언절구(五言絶句) 10수(首)로 지었다.
[내용]
상주는 예로부터 삼산(三山)[석악(石嶽) 천봉산(天峰山), 노악(露嶽) 노음산(露陰山), 연악(淵嶽), 갑장산(甲長山)], 이수(二水)[남천(南川), 북천(北川)], 양강(兩江)[영강(穎江), 낙동강(洛東江)]으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연악은 서쪽의 노악과 북쪽의 진산(鎭山) 석악과 더불어 상주의 안산(案山)으로서 상산(商山)[상주의 옛 이름] 삼악(三嶽)의 제일 명산이다. 『연악문회록』의 무대가 바로 연악이기도 하다. 연악 아래에는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1562~1635]이 명명(命名)한 연악구곡(淵嶽九曲)이 있고, 연악구곡이 시작되는 곳에 연악서원(淵嶽書院)이 있다. 연악서원은 1553년 상주목사 신잠(申潛)[1491~1554]이 창건한 후로 흔히 상산사호(商山四皓)라 불리던 사람들이 평소 학문을 닦고 노닐던 곳으로 유명하다. 상산사호는 친구들과 모여 문회를 열고는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문회가 1622년 5월에 열린 연악문회이고, 이때의 시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연악문회록』이다.
『창석집(蒼石集)』 「연보(年譜)」 1622년 조에 보면, “연악서재에서 조찬한 등과 문회를 가지고 『연악문회록』을 짓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악문회에 참석한 선비들은 당시 상주목사였던 조찬한,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월간(月澗) 이전(李㙉)[1558~1648], 송만(松彎) 김헌(金憲)[1556~1624], 지연(止淵) 김진원(金振遠)[1559~1641],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1562~1635], 낙애(洛涯) 김안절(金安節)[1564~1632], 북계(北溪) 조광벽(趙光璧)[1566~1642], 우연(愚淵) 김지복(金知復)[1568~1635], 눌헌(訥軒) 강용후(康用候)[1590~1641], 반포(半浦) 이상필(李尙弼), 허충용(許翀龍), 김진(金縝) 등 모두 15명인데, 시 작품을 남긴 이는 13명이다. 아울러 연악문회를 주관한 이는 당시 연악동주(淵嶽洞主)였던 남계(南溪) 강응철(康應哲)이었다.
2009년에 상주고등학교 한문 교사인 김정찬이 원문을 번역하여 『국역 연악문회록』을 상주박물관에서 펴냈는데, 여기에는 『연악문회록』 해제(解題)와 상주박물관 관장 김호종의 논고(論考)도 실려 있다.
[특징]
『연악문회록』의 특징을 살피는 데는 연악문회의 취지와 성격을 서술한 이준의 서문을 보는 것이 가장 적확하다. 보통의 경우 문회는 강론 위주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이준의 서문에는 연악문회가 강론 위주의 문회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유상(遊賞)을 겸한 시회(詩會)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악문회록』은 연악문회에서 지은 시문을 엮은 것이다.
[의의와 평가]
연악문회에 참석한 상주 선비들은 대부분 당대 영남의 큰 선비들이었고, 조찬한, 정경세, 이준 등은 전국적으로 문명(文名)을 얻었던 선비들이다. 연악문회가 한갓 시골 선비의 문회로서만이 아니라, 당시 향촌 사회 선비들의 문회 성격을 파악할 만큼 질적 수준을 지닌 문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문회에 참석한 선비들은 거의 문과 급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한문학사 및 시조 문학사에 이름이 오를 정도로 문학적 수준이 높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연악문회록』은 무엇보다도 같은 해 7월에 간행한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과 쌍벽을 이루는 상주 선비들의 공동 시집이면서 현존하는 상주 최초의 공동 시집으로서 위상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