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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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In The 1910s, Chae Ki-joong Led The Korean Liberation Society, A Secret Society Independence Movement Grou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채기중의 독립운동 이야기.
[개설]
채기중(蔡基中)[1873~1921]은 1873년 7월 7일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태어나 풍기(豐基)로 이거하였다. 1913년 경북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조직하여 일제 강점기 1910년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무장투쟁의 기원을 이룩하였다. 1915년 경북 대구에서 대한광복회 결성에 참가하여 경상북도 지부장으로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집과 청장년을 모집하는 의열 투쟁을 벌였고, 국외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지원하였다.
[유복자로 태어나다]
채기중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이다. 아버지는 채헌락(蔡獻洛)이고, 어머니는 곡부 공씨(曲阜 孔氏)이다. 다섯 형제 채기학(蔡基鶴)·채기인(蔡基仁)·채기구(蔡基龜)·채기경(蔡基敬)·채기중(蔡基中)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인천 채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낸 채선무(蔡先茂)인데, 채기중은 채선무의 28대손이다.
채기중의 집안은 예조판서를 지내 14대조 채수(蔡壽)가 1506년(중종 원년) 상주에 입향하면서 일족들이 세거하였다. 소암리는 인천 채씨의 집성촌이다. 아버지 채헌락은 채기중이 태어나기 전 1873년 사망하였다. 채기중은 유복자로 태어나 40이 넘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채기중의 집안은 양반이었지만, 식량을 자족할 정도의 형편이었다. 큰형은 숙부 채응락(蔡應洛)의 양자로 갔고, 3남은 채기중이 아홉 살 때인 188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채기중은 족숙 채세환(蔡世煥)과 문광열(文光烈) 등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소몽유고(素夢遺稿)』 행장의 “성품이 민첩하며 몸이 장대하지는 않으나 튼튼하고 순박하며 독학으로 한학을 배우고 충신열사를 숭배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때, 주로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경 채기중은 개성 고씨(開城 高氏)와 결혼하여 채순현(蔡純鉉)·채중문(蔡仲文)·채숙현(蔡叔鉉)·채우현(蔡又鉉) 네 아들을 두었다.
채기중이 태어난 함창 소암리는 일본군이 주둔하던 태봉과 가까운 곳이었다. 채기중이 청년기이던 1895년 이후 함창 태봉은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의 공격 대상이었다. 당시 향리 출신의 노병대(盧炳大)나 족숙 채섬환(蔡暹奐), 강순필(姜順必) 등이 이강년의진에 참여하거나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비록 채기중은 의병 투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의병 활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채기중은 풍운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민족의식을 품은 지사로서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풍기로 이거하다]
채기중은 34세가 되던 1906년 봄 풍기로 이거하였다. 풍기는 『정감록(鄭鑑錄)』에서 지목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다. 『소몽채기중선생전기』에 따르면, 채기중은 1906년 풍기군 서부면 한림동(翰林洞)으로 이사하였으며, 다시 1913년 인근 동부면 운전동(雲田洞)으로 옮겼다. 한림동과 운전동은 십승지지에 몰려든 정감록파가 모여 살았던 중심지이다. 일찍부터 “풍기로 가야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는데, 채기중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채기중은 1912년 한림동 동민들의 추천으로 이장(里長)이 되었고, 1913년 운전동으로 옮긴 뒤에도 이장을 맡았다. 채기중은 정감록파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채기중은 고향 상주에서 집안 동생 채기목(蔡基穆)을 풍기로 불러들여 장차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한편,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직접 만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채기중이 채기목에게 지어 준 시 “천 번이라도 죽겠다는 의리는 능히 저 일본을 물리치고[千死義能排彼日], 일생 동안 먹은 마음은 대한의 회복이었네[一生志決復斯韓]”는 풍기에서 채기중이 품은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 준다. 채기중은 풍기에 모인 지사들을 규합하며 장차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풍기광복단을 조직하다]
1913년 음력 1월 채기중은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性山) 등 10여 명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구 풍기군 동부면 운전동]에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조직하였다. 채기중이 주도하여 전국의 의병장 및 용력을 갖춘 인사를 단원으로 조직한 혁명 기관이었다. 채기중 등은 의병 전쟁과 같은 무력 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11년 전개된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과 같이 새로운 국가 건설이 목표였다.
채기중 등은 먼저 자신들의 재산을 모아 자금으로 삼았다. 풍기광복단 결성 초기의 단원들은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 의병 출신 및 용력을 갖춘 인사들이었다. 대부분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의병 출신이거나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지로 알려진 풍기에 우거(寓居)한 인사들이었다. 채기중 등은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와 연계하여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군자금 모집과 청장년의 국외 이주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910년 국권을 잃어버린 뒤 국내에서 항전 기반을 상실한 의병 출신 인사들은 만주를 새로운 대일 항전의 기지로 설정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이들은 국내 세력과 상호 교통하였는데, 만주에서 국내를 왕래하며 국내의 근거지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었다.
[동지를 규합하다]
채기중은 풍기에 은거하면서 의병 출신 인사와 풍기에 우거한 인사들을 규합하였다. 주목되는 영입 인사는 상주 출신의 강순필과 채기목이다. 강순필은 채기중과 같은 향리의 친구이자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의병이었고, 채기목은 소암리 출신의 친척이며 1910년경 풍기로 이사한 독립운동가였다. 강순필은 채기중이 조직한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1914년 9월 문경에서 의병 출신 인사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민단조합(民團組合)에도 참여하였다. 민단조합은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경북 북부 지역 낙동강 연변 출신의 양반 유생들이 조직하였다. 특히 문경 출신으로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참모장 이동하·최욱영,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李湜宰), 순국 의사 김순흠의 아들 김낙문(金落文) 등이 주축이 되었다. 상주 출신 의병장 노병대, 이강년의진에 참여하였던 풍기광복단의 강순필 등도 민단조합에 참여하였다.
한편, 채기중은 의병장 벽도(碧濤) 양제안(梁濟安), 양제안을 통하여 혁신적인 유림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과 동지적 결합을 할 수 있었다. 양제안은 충청도 보은군 청산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양제안은 1895년 김산의진(金山義陣)과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으며, 의병 해산 후 영일군 죽장면 보현산(普賢山) 두마리(斗麻里)에 은거하다 채기중을 만나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였다. 양제안은 1913년 1월 만주에 들어가 활동하던 중, 만주에서 만난 박상진과 박상진의 동지 이복우(李福雨)를 채기중에게 소개하였다. 양제안 등과의 동지적 결합을 통하여 채기중은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과 청장년의 국외 이주를 추진하였다. 이로써 무장투쟁이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되었다.
[무장투쟁을 목표로 활동하다]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은 모험용사(冒險勇士) 80여 명을 조직하여 만주에서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전국에서 부호의 금고를 강탈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1914년 9월 결성된 민단조합은 풍기광복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14년 11월 민단조합의 이식재는 최욱영·강병수 등과 충북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여 원을 강탈하고, 충북·경북 지역에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6년 6월 이동하는 자신의 명의로 군자금 200원을 제공하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이식재로 하여금 경북 예천군의 부호 박심수(朴尋洙)를 대상으로 군자금 조달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민단조합의 군자금 모집 활동은 풍기광복단을 이끌던 채기중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다.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은 1916년 10월 일본인이 경영하는 강원도 영월의 중석광 운영자금을 강탈하기 위하여 부하 10여 명을 광부로 위장하여 파견하고, 곧이어 이식재와 조우경(趙禹卿)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8년 1월 이동하·이은영·김낙문·이식재·최욱영 등이 충북 제천경찰서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및 강도범으로 재판에 회부됨으로써 민단조합의 실체가 드러났다.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은 민단조합과 연결하여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하여 연락을 취하는 한편,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국내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 단체가 국외의 독립운동 기지를 지원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의 국민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투쟁 방략에 따른 것이었다.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다]
풍기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채기중은 박상진을 비롯한 이시영·정순영·홍주일·정운일·최준 등의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들과 뜻을 같이하였고, 이 과정에서 양제안은 회원들의 동지적 결속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즉, 풍기광복단과 민단조합, 그리고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 과정에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통합적 기관으로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것이다.
대한광복회는 결성 초기부터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도 및 서간도와 북간도까지 조직을 확대하였다. 우재룡(禹在龍)의 『백산실기(白山實記)』에는 대한광복회의 조직망과 주요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사령관 박상진 이하 지휘장은 우재룡·권영만(權寧萬)이었으며, 각도의 지부장은 경상도 채기중, 충청도 김한종(金漢鍾), 전라도 이병찬(李秉燦), 경기도 김선호(金善浩), 함경도 최봉주(崔鳳周), 평안도 조현균(趙賢均), 황해도 이해량(李海量), 강원도 김동호(金東浩) 등이었다. 본부회장은 박상진 이하 최준(崔浚), 이복우 등이며, 만주사령관은 이석대(李奭大)가 맡았다. 국외에서는 만주안동여관(滿洲安東旅館)의 손회당(孫晦堂), 봉천삼달양행정미소(奉天三達洋行精米所)의 정순영(鄭舜永) 등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본부를 중심으로 국내 지부와 만주 지부인 길림광복회, 그리고 국내외 연락 기관을 설치하였다. 이는 풍기광복단과 민단조합, 그리고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을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대한광복회의 본부 조직은 총사령 박상진이 맡았다. 본부 조직을 총괄한 박상진과 박상진의 처사촌 최준, 최준의 이종사촌 이복우가 핵심이 되었다. 본부는 이즈음 울산에 세거하다 경주로 이거한 경주 녹동의 박상진 집이었다. 대한광복회의 지휘장 우재룡과 재무부장 최준, 그리고 이복우가 모두 경주에 거주하였다.
[체포와 순국]
1918년 1월부터 대한광복회 회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을 비롯하여 지부원 대부분이 체포되었으며, 만주 망명을 추진하던 총사령 박상진도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기중은 전라도 보성 출신의 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중국 망명을 준비하였다. 채기중과 이병호는 전라남도 일원에서 경고문을 발송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8년 6월 27일 목포에서 체포되었다. 목포에서 조사를 받은 뒤 공주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예심을 받았고,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대한광복회 회원 32명과 함께 1심 판결을 받았다. 채기중은 박상진·김한종·임봉주·김경태·유창순·장두환 등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김재창을 비롯한 17명이 7년에서 5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나머지 8명은 무죄 방면되었다.
채기중은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항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채기중은 “시종 온화한 말을 하고 한 번도 선후가 바뀌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기상이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채기중은 1921년 8월 12일 김경태·임봉주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채기중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채기중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