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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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Formation and Activities of Sajok Class in Sangju Area in The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정의]
조선 시대 상주 지역 양반 가문의 형성과 성장 및 활동에 관한 이야기.
[개설]
조선 시대 대읍인 상주(尙州)는 읍격에 비해 토성(土姓)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15세기 이후 타 지역 출신 사족들이 이거하여 오면서 본격적인 사족층이 형성된다. 16세기 중반 상주는 다양한 학문적·사상적 갈래가 온존하였고, 상주목사 신잠(申潛)[1491~1554]과 류성룡(柳成龍)[1542~1607]에 의하여 지역 학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이에 상주 사족은 유향소 설치, 향사당 건립, 향안 작성 등을 통하여 향촌 사회를 주도하였고, 임진왜란 극복에도 앞장섰다. 또한 전후 복구와 향촌 질서의 재정비, 상주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 존애원(存愛院)과 도남서원(道南書院) 설립도 사족층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는 지역 내에서 노론계가 확대되면서 향론이 양분된다. 남인과 노론이 출입처를 달리하며 병존하는 현상과 근기남인이 이주하여 오는 모습은 영남 내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상주만의 지역적 특성이다.
[상주 사족의 형성과 성장]
상주는 1018년(고려 현종 9) 8목(牧)의 하나로 정해진 후 조선 초 세종·세조 연간에도 목사가 관찰사를 겸하고 8개의 속현을 거느린 대읍이었다. 지리적으로 북쪽은 조령에 가까워 충청·경기 지역과 연결되고 남쪽은 낙동강에 임한 수륙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낙동강의 지류와 공검지를 활용한 농업이 발전하여 물산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 사회 신분 면에서의 획기적인 변화는 재지 사족과 이족(吏族)의 분화를 들 수 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로 넘어오면서 양자 간의 분화는 더욱 촉진되어 같은 토성 출신이면서 한쪽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재경 관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다시 이족과 재지 사족으로 구분되어 갔다. 16세기에는 사족과 상민의 구분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상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5세기까지 상주의 토성 사족은 상산 김씨(商山 金氏)에 불과하였다. 상주목은 경주와 함께 경상도 본영(本營)으로서의 위상을 가졌으나 토성 수에서는 중소 군현과 비슷하였다. 상산 김씨의 경우에 고려 중기부터 계속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고, 고려 말 김득배(金得培)·김선치(金先致) 형제가 공신에 책봉되어 많은 식읍을 하사받았다. 특히 김선치의 세 아들 모두 조선 왕조에서 관직에 나아가 명문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상산 김씨 외에 박(朴)씨·주(周)씨·황(黃)씨도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나 상주에 정착하지 못하거나 그 활동이 미약하였다.
상주는 토성 사족이 열세인 반면에 15세기 이후 타 지역 출신 사족들이 처향 내지 외향 연고에 따라 이거하는 경우가 잦았다. 대표적인 성씨는 순천 김씨, 풍산 김씨, 풍양 조씨, 동래 정씨, 장수 황씨, 나주 정씨, 남양 홍씨, 청주 한씨, 진양 정씨, 진양 강씨, 광주 노씨, 흥양 이씨, 영산 김씨, 여산 송씨, 옥천 전씨, 신천 강씨 등이다. 상주로 이거한 사족은 대부분 혼인을 매개로 입향하였고, 후에는 학문적으로 상호 연결되면서 중층적인 학혼(學婚) 관계를 형성하였다.
16세기 중반 상주는 이연경(李延慶) 학맥의 노수신(盧守愼)·강복성(康復誠) 계열, 남명·화담학파와 가까운 김범(金範) 계열, 조광조(趙光祖) 학맥의 김옹(金顒)·김충(金冲) 계열, 퇴계·남명학파와 두루 소통한 김언건(金彦健)·김각(金覺) 계열 등이 활동하며 다양한 사상적 학맥이 공존하고 있었다. 또한 16세기 중후반 상주목사로 부임한 신잠과 류성룡은 지역 학풍을 진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전자는 지역 내 18개의 서당 건립을 통하여서, 후자는 많은 문인들을 양성하여 상주의 학풍을 일신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상주 사족들은 유향소 설치, 향사당 건립, 향안 작성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향촌 사회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향사당은 15세기 후반 한순(韓順)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향안은 16세기 중반 작성된 뒤 추록이 이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595년 『구록(舊錄)』이라는 이름을 붙여 복원하였다. 『구록』에는 총 308명의 인물과 50여 성관이 등재되어 있는데, 16세기 중반 상주 관내에 거주하고 있던 명문 사족이 거의 망라되었다. 정경세(鄭經世)는 『향안록(鄕案錄)』 서문에서 “영남 60여 고을에는 각각 향안이 있다. 그중 유독 안동과 우리 상주가 가장 성대하면서도 그 선발에 뽑히기가 아주 어렵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같은 언급은 상주 지역 사족세가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사족층의 결집 양상은 1566년 병인계(丙寅契)와 1578년 무인계(戊寅契)의 문서를 통하여 확인된다. 15명이 참여한 병인계는 진양 정씨 4명, 창원 김씨·여산 송씨·영산 김씨 각 2명, 상산 김씨·광주 노씨·예천 권씨·무송 윤씨·영산 신씨 각 1명씩이다. 21명이 참여한 무인계는 기존의 병인계 참여 가문에 흥양 이씨·재령 강씨·장수 황씨가 추가되었다. 병인계와 무인계에 입록된 성씨들은 상주 남촌을 근거로 활동한 가문이며, 임진왜란 이전 지역 사회를 이끌어 간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상주 사족들의 성장은 「상주사마록(尙州司馬錄)」을 통하여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 상주 사족의 의병 활동]
1592년 4월 14일 관보(官報)를 통하여 왜군의 침략 소식이 상주에 알려졌다.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한 중앙군 약 60여 명과 관내의 민관군 400~500여 명이 연합하여 4월 25일 북천에서 왜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그 결과 상주는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왜군이 병력 일부를 주둔시켜 상주와 근교를 노략질하는 바람에 상주 사족들은 대부분 산속으로 피신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상주 사족의 창의는 다른 지방에 비하여 비교적 늦은 7월 말에 구체화되었다. 사족 40여 명과 궁수 50여 명은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봉(李逢)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황령사(黃嶺寺)를 본거지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창의군에 이어 충보군(忠報軍)[대장 김홍민(金弘敏)], 상의군(尙義軍)[대장 김각(金覺)] 등이 연달아 결성되었다. 충보군에는 사족 70여 명이 참여하였고, 특히 상의군은 창의군·충보군보다 더 조직적이고 많은 사람이 가담하고 있었다. 상주 사족 대부분이 3개의 조직에 참가하고 있었다. 상층 지도부는 전직 관료와 유생으로 구성되었고, 대다수가 향안에 등재된 인물이거나 그 자손이었다. 상주 의병진은 한 개인이 창의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 전체의 공동 노력에 의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의병의 활동은 매복이나 야습 등으로 수 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정도에 머물렀으나, 정기룡(鄭起龍)이 상주판관으로 부임한 10월 이후에는 관군과 협력하여 당교(唐橋)의 적을 대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때 의병은 관군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어 명나라 군대가 개성을 수복하는 1593년 2월 중순 무렵부터 의병은 주로 관군에 편성되어 전투보다는 물자 지원이 주된 업무가 되었다. 이러한 상주 사족의 의병 활동과 더불어 명나라군의 진격으로 왜군이 퇴각하면서 지역민들은 삶의 터전으로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미증유의 전쟁을 겪은 상주 향촌 사회는 막대한 인명 손실과 전답의 피폐화, 도적의 봉기 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한 복구와 향촌 질서의 재정비가 절실한 문제였다. 이는 재지 사족들이 해결해야 할 필수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상주 사족은 곧바로 향사당 중건과 향안 중수, 동계(洞契) 재작성을 진행하였고, 사족 중심의 향촌 사회를 확립하여 간다. 전후 복구를 이끌었던 주축 세력은 이준·전식·정경세 등의 의병장 출신 류성룡 문인들이었으며, 이후 상주 지역 사족들의 활동은 지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존애원과 도남서원 설립으로 이어진다.
[존애원과 도남서원 설립]
상주 지역 전후 복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 의료 기관으로 잘 알려진 존애원이었다. 존애원은 정경세가 발의하여 전쟁이 종식된 지 1년 뒤인 1599년에 설립되었다. 발의는 정경세가 하였지만 상주 사족들 전체의 힘이 결집된 성과였다. 설립 초기에 “찾아오는 병자가 날로 늘어나자 머물러 숙박할 곳이 있어야 하므로 집을 지어 병자들의 숙소로 삼았다. 약을 팔 때는 값대로 받았는데, 원금은 보존하고 이윤을 늘렸으며, 그것으로 창고를 채우고 여러 약재를 모두 마련하여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주었으니, 그 효과가 민간에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라고 할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존애원의 가치는 신분에 관계없이 원하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존애원은 단순한 의료 기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족들의 강학처로 이용되었으며, 향촌의 6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백수회(白首會) 및 시회 개최 장소로도 기능하였다. 정경세는 1605년 상주목사로 부임한 김상용(金尙容)을 존애원으로 불러 모임을 열고 참석한 이들의 숙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존애원은 상주의 유력 사족들에 의하여 설립된 사설 의료원이었으나 공공적 성격으로 운영되었다. 지방의 관 주도 의료 체제가 사족 중심의 의료 체제로 바뀌어 가는 시대적 변화를 앞서 주도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도남서원이다. 도남서원은 조선 후기 영남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한 곳이다. 임진왜란 뒤 상주 지역 전체 사족의 참여와 노력으로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을 모시고 1604년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류성룡의 자문을 받아 서원의 위치·서원 이름 등을 선정하였다. 서원 이름으로 채택된 ‘도남’이란 조선의 도통 정맥이 영남에 있고, 영남에서 상주가 이를 계승하였음을 천명한 의미이다. 도남서원은 이후 1616년 노수신, 1631년 류성룡, 1635년 정경세를 추향하였다. 이는 상주 향론이 반영된 결과로, 상주를 안동과 대등한 또 하나의 영남학파의 거점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첫 추향자 노수신은 상주를 상징하는 인물이지만 양명학적 학문 성향 때문에 크게는 주류 성리학계에서, 작게는 안동권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도남서원 배향이 가능하였던 것은 사상을 떠나 지역 후배 집단의 공조와 노력 덕분이었다. 당대 상주의 사족들이 노수신을 향현이자 서원에 추향할 존모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정경세 추향은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학통의 적전 계보를 정립한 사업인 동시에 남인계 서원으로서의 성격을 대내외에 분명히 한 것이다.
[조선 후기 상주 사족 사회의 변화]
17세기 중반 이후 영남 지역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집권 세력에 의하여 포섭된 서인 또는 노론 세력이 형성되어 나갔다는 점이다. 상주는 일찍부터 기호학파 내지 사족과의 교류가 있어 왔다. 임진왜란 직후 우율(牛栗)[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제자인 창녕 성씨 성람 가문의 이주와 1632년 정경세가 송준길을 사위로 맞이한 일, 서인계 학자 배출, 기호학파와의 교류를 통한 문자 수수 및 혼인 등의 과정이 전개되면서 17세기 중후반 상주 지역 내에서 친서인 세력의 확대가 두드러진다.
갑술환국 이후 노론 정권은 영남 지역 내 노론 세력 확대책과 연계하여 그 활동 공간으로서 서원 건립과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는데, 대표적인 서원이 바로 상주 흥암서원(興巖書院)이다. 흥암서원은 영남 지역 노론 사회를 영도하며 구심점 역할을 한 서원이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상주 지역은 노론 세력의 확장과 노론계 서원의 출현이라는 시대적 변환점을 맞이했고, 이후 상주의 사족 사회는 남론(南論)을 고수한 도남서원과 노론계를 지향한 흥암서원으로 향론이 양분되었다. 상주 노론 사족의 주요 성관은 창녕 성씨·평산 신씨·인천 채씨·청도 김씨 등이다. 이 때문에 향안도 각기 따로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당대 양 당파를 대표하던 지역의 학자를 꼽으라면 남인은 이만부(李萬敷), 노론은 성만징(成晩徵)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동묘 건립을 두고 벌인 사상적 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상주향교를 둘러싼 분쟁도 나타났다. 1725년 노론 사족 10여 명이 향교로 들어와 임원을 선출하고 반대편 인사를 처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어 흥암서원을 거점으로 삼은 노론 사족은 이인좌의 난 이후 집권 노론 세력의 지원을 받아 일시적으로 도남서원까지 장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남인계가 주도권을 회복하였고, 이후 서로 출입처와 모임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처럼 남인과 노론 사족이 거의 대등한 입장에서 병존·갈등하는 모습은 다른 영남 지역에서는 잘 목격할 수 없는 흥미로운 현상으로, 지역적 특성의 하나이다. 또한 근기남인 출신들이 상주로 이거하여 오면서 지역 사족 사회에 상당한 역동성을 불어 넣은 대목도 특기할 만한 조선 후기 상주 지역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