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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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Jon Ae-won, The Spirit of Love for The People that Blossomed in Sangju 400 Years Ag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1길 5[율리 35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99년 - 낙사계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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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2년 - 존애당 건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82년 - 존애원 무고의 변으로 일시 활동 중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86년 - 존애원 중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3년 3월 25일 -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
관련 지역 | 존애원 -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1길 5[율리 353]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있는 존애원의 역사적 가치와 현대적 의미.
[개설]
존애원(存愛院)은 임진왜란 이후 향촌 사회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1599년(선조 32) 결성된 낙사계(洛社契)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180여 년 동안 상주 지역의 의료 기관인 동시에 강학 공간이자, 향촌 사회의 교화 기능을 담당하는 복합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존애원은 경제적 사정 등으로 인하여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의료 시설보다는 강학의 기능이 강조되다가 후기에 이르러 서당으로서 이름을 유지하게 되었다. 비록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은 상실하였지만, 조선 시대 의료 기반이 열악한 향촌 사회에서 지역 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사설 의료원을 만들고, 신분에 상관없이 지역민 전체를 대상으로 의료 혜택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존애원은 상주 양반가의 선비 정신과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이후 상주 향촌 사회의 복원과 존애원 설립]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이 날씨의 춥고 더움의 침해를 받아 400여 종의 병이 걸린다. 그러나 약 한두 가지를 구비하지 못하여 이따금 수명을 마칠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질병 때문에 죽고 만다. 이는 바위나 담장 속에 손발이 꽁꽁 묶여 어찌할 수 없이 죽어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준이 쓴 『존애당기(存心堂記)』에 수록된 성람(成灠)의 말처럼 조선 시대 의료 상황은 매우 열약하였다. 대부분의 의료 시설이나 약재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어서 지방의 경우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지방 의료의 상황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더욱 궁핍해졌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질병 앞에 고통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상주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주요 공격로에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상주에 거주하는 양반들은 전쟁 후 피폐하진 향촌 사회를 복구하고 양반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료 시설인 존애원을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상주 지역의 재건은 대부분 의병으로 활동하였던 양반 가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지역의 사족들은 서원을 건립하고 향안과 동계를 중수하여 양반들을 결집시키고, 양반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를 유지·강화하고자 하였다. 먼저 임진왜란 이전에 운영되던 병인계(丙寅契)와 무인계(戊寅契)를 합쳐 낙사합계(洛社合禊)를 조직하였고, 계원들이 각기 재원을 출자하여 사설 의료 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존애원 건립을 주도한 인물은 정경세(鄭經世)를 비롯하여 이전(李㙉)·이준(李埈) 형제, 김각(金覺), 성람(成灠) 등과 상주 외남면을 중심으로 주변에 거주하는 양반들이었다. 정경세는 임진왜란 직후 북인의 탄핵으로 고향인 상주에 내려와 있으면서 존애원 설립에 참여하였다. 존애원 설립을 발의하면서 당시 퇴계 학통상의 위상과 중앙 관료를 지냈던 명망을 바탕으로 지역 유림을 결집시켰다. 이준은 당시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있었으므로 현장에서 활동할 수 없었으나 존애원 설립을 지지하고 동참하였다. 성람은 유학자이자 의학에도 조예가 깊은 유의(儒醫)로 정경세의 제의를 받아 존애원의 초대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 다수의 인물이 존애원 건립에 참여하였는데, 1956년 이종린(李鐘麟)이 쓴 「존애원수정안좌목(存愛院修正案座目)」에 따르면 낙사계 결성 당시 참여한 가문은 회산 김씨·여산 송씨·영산 김씨·진양 정씨·무송 윤씨·상산 김씨·전주 이씨·재령 강씨·장수 황씨·흥양 이씨·신천 강씨 등 11개 가문이었다. 이후 추가로 편입된 가문은 청주 한씨·예천 권씨·창녕 성씨·경주 손씨·단양 우씨 등 5개 가문으로, 모두 16가문이 참여하였다.
참여 인사 중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 다수 포함된 점도 주목된다. 류성룡이 상주목사를 역임할 때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사들이 많았는데, 류성룡을 통하여 퇴계학맥에 소속되어 동질감을 가지고 향촌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공동된 의식을 가진 인사들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낙사계를 조직하고 존애원 설립에 동참하였다.
[지방 의료 시설은 어떻게 운영되었나?]
존애원은 1599년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1길 5[율리 353]에 설립되었다. 사람들에게 약재를 제공하고, 의술을 베푸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약재는 한가하게 지내는 일손을 동원하여 지역의 약재를 채취하기도 하였고, 중국 약재는 무역을 통하여 구비하였다. 약재가 마련되자 약재를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고, 환자들이 치료를 위하여 모여들어 머물 수 있는 집을 지어 숙박하게 하고 의술은 성람이 담당하였다. 존애원은 의사, 약재, 창고, 숙박 시설 등을 갖추어 운영하였고, 1602년 중심 건물인 존애당을 완성하면서 의료 시설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운영을 원활하게 하려면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였는데, 운영비는 낙사계 계원들이 출연한 자금을 바탕으로 판매한 약재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재원을 바탕으로 존애원은 의술을 행하였는데, 주목할 점은 설립과 운영에 도움을 준 양반뿐만이 아니라 상주의 촌민 모두가 존애원에서 제공하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향촌민을 대상으로 운영된 존애원의 애민 정신과 공생의 가치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의료 시설로서 존애원의 존속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다. 존애원은 설립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부터 경제적 사정으로 운영이 어려워졌으며, 그 결과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어 18세기 중기에는 강학을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존애원사적(存愛院事蹟)』에 따르면 1782년(정조 6) 존애원은 무고의 변으로 인하여 소장하고 있던 문적과 재물·곡식을 탕진하여 약방을 모두 철거하였다고 한다. 무고의 변이란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일으킨 무고 사건으로, 낙사계 및 존애원 운영에서 소외되어 원한을 품고 일을 벌였다고 한다. 무고 사건은 잘 해결되었지만 이후 존애원은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지역의 의술·강학·교화를 담당하는 복합 시설 존애원]
존애원은 상주의 양반들이 임진왜란 이후 향촌 사회를 복구하는 과정에 건립하였다. 일차적으로 질병에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된 공간이었지만, 양반들을 결집시키고 성리학적 지배 질서 강화를 통하여 향촌 사회 내 양반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목적 아래 상주의 양반들은 존애원을 의료 시설이자 강학 및 향촌 사회의 교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602년 겨울 존애원에서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자료가 부족하여 이후의 내력을 상세히 알 수 없으나 1749년(영조 25) 간행된 『상산지(商山誌)』 서당 조에 존애원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의료 시설보다 강학의 공간으로 점점 기능이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존애원은 1782년에 발생한 무고의 변으로 크게 쇠퇴하게 되었지만, 1886년(고종 23) 도감(都監) 손영로(孫永老)를 중심으로 존애원이 중수되었다. 『존애원사적』을 보면 존애원을 “향교와 서원에 버금가는 곳”이라 표현하였는데 의료 시설이 아닌 강학처로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손영로는 중수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당시 전하던 문적을 재정리하였고, 25개의 절목과 완문을 남겼다. 중건에는 진양 정씨·흥양 이씨·여산 송씨·영산 김씨·월성 손씨·청주 한씨·상산 김씨·재령 강씨·단양 우씨·회산 김씨·무송 윤씨·창녕 성씨·전주 이씨 등 13개 가문이 참여하였다. 「존애원수정안좌목」에서 확인되는 16개 가문 중 장수 황씨, 신천 강씨, 예천 권씨가 빠져 있다.
한편, 존애원에서는 지금의 경로잔치에 해당하는 백수회(白首會)와 백장회(白場會)를 열기도 하였다. 백수회는 1607년 처음 열렸는데, 정경세가 쓴 「계중위고년설연청문(稧中爲高年設宴請文)」을 보면 백수회의 대상은 60세 이상이었다. 초청 대상자는 낙사계 계원을 포함하여 지위를 구분하지 않고 나이로만 선정하였다. 의료의 혜택은 물론 백수회까지 향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존애원의 열린 운영은 상주 양반들의 애민 정신을 보여 준다. 백수회는 1607년을 시작으로 18세기 초·중엽까지 활발하게 개최되었으나, 1782년 무고의 변으로 존애원이 큰 타격을 받으면서 한동안 개회하지 못하였다. 이후 1886년 존애원이 중건된 후 다시 1908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1893년부터 전통 의례를 거행하는 등 예절 교화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존애원은 의료 기관인 동시에 강학 공간이자, 향촌 사회의 교화 기능을 담당하는 복합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존심애물(存心愛物)’의 박애 정신]
존애원이라는 명칭은 정자(程子)의 ‘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취한 것이다. 이준이 쓴 『존애당기』를 보면 “대저 남과 내가 친소(親疎)가 비록 다르지만 천지(天地) 사이에 함께 태어나서 동일한 기운을 받았다. 남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차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착한 마음으로 동포를 구제하려는 것이니 이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일이다. 일개 선비로 그 지위는 비록 보잘것없고 베푸는 것이 크지 못하더라도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愛物]만 있다면 반드시 만물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이 당의 이름을 존애(存愛)로 한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름과 기문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존애원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푸는 열린 공간이자 애민의 장소였다. 더불어 고을의 6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백수회를 개최하여 효제(孝悌)를 실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존애원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하여 강학 활동도 함께 병행하였다.
구휼과 경로효친, 강학 할동과 함께 모든 향민에게 열려 있던 존애원의 운영 방식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가치이자 배워야 할 덕목이다. 이에 존애원의 공간은 1993년 2월 25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대중이 쉽게 존애원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존애원을 스토리텔링한 『청리가는 길』을 발간하고 라디오 드라마 『존애원, 낙강에 뜬 달』 등을 제작하였다. 동시에 ‘존애원 의료 시술 재현 행사’를 매년 개최하여, 조선 시대 상주 양반들의 선비 정신과 공생·박애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