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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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20년대 경상북도 상주에서 결성된 청년 운동 단체.
[개설]
상주청년회(尙州靑年會)는 1920년 4월에 상주청년구락부의 명칭을 바꾸어 창립된 청년 운동 단체이다. 창립 당시 회원은 300여 명 정도였다. 상주청년회의 전신인 상주청년구락부는 1919년 10월 26일에 유홍우(柳弘佑)·강상희(姜相熙)·석응목(石應穆) 외 수십 명의 청년이 발기하여 설립된 단체였다.
[설립 목적]
상주청년회는 지(智)·덕(德)·체(體)의 삼육(三育) 함양을 목표로 한 문화 운동의 수행 기관으로 창립되었다. 상주청년회는 조선 청년 운동의 방침에 따라 1925년 이후에는 대중 운동의 선구자가 될 것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7년 이후에는 ‘전 민족적 청년 운동’ 방침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상주청년회는 1925년 10월 상주청년연맹의 결성을 주도하고, 상주청년연맹의 가맹 단체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상주청년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여 상주청년회를 해체하고 상주청년동맹 상주지부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상주청년회의 활동은 크게 지역 사회에서의 청년 운동과 전국 차원의 청년 운동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지역 사회에서는 우선 교육 운동에 집중하였는데, 창립 이듬해인 1921년 정기 총회에서 철명강습소(哲明講習所) 설립안을 결의한 데 이어 1921년 6월에는 무산 아동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였다. 박인규(朴寅圭)·강신협(姜信協) 등이 무보수 야학 교사로 활약하였다.
1923년 7월 14일 보명강습소(普明講習所)를 인수, 학급 수를 3학급에서 4학급으로 늘리고 교실 증축 계획을 수립하였다. 1923년 12월 4일 교명을 보명학원(普明學院)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교육 사업을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하의 상주군은 보명학원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1925년 8월 29일 상주청년회는 긴급위원회를 열어 상주군의 보명학원 불허에 대한 항의를 결의하였다. 1923년 12월 4일 교명 개칭 당시 보명학원 원장은 박원석(朴元錫), 원감은 박정현(朴正鉉)이었고, 교사는 전재영(全在永)·송태익(宋泰翼), 회계는 김기목(金基穆)이었다.
교육 사업 외에도 상주청년회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대부분의 사업이 일제 당국의 금지로 인하여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우선 1925년 8월 상주군 10여 개 단체와 연합하여 상주군 화동면의 수재민 400여 호를 구제하기 위한 구제극(救濟劇)을 공연하려 하였으나 상주경찰서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또 1925년 8월 개최하려 한 웅변대회 역시 상주경찰서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이에 상주청년회는 상주 지역 청년 단체와의 연대와 통일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우선 1925년 사상 단체였던 상주새모임을 합병하였으며, 1925년 10월 1일에는 상주청년연맹 발기 단체로 이름을 올렸다. 상주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15일 창립되었으며, 상주청년회는 함창청년회와 옥산청년회와 함께 상주청년연맹의 가맹 단체가 되었다. 또한 1925년 9월 상주 지역 청년 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상주용혁단을 흡수 합병하였다.
1927년 상주 지역 청년 운동의 통일적 지도 기관으로 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상주청년동맹의 결성에는 상주청년회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상주청년회는 1927년 9월 25일 정기 총회를 개최하여 청년동맹에 관한 안건 등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27년 10월 5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옥산청년회, 연봉청년회, 연원청년회, 중모청년회, 함창청년회 등 청년 단체들의 대의원들과 함께 참석한 가운데 상주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상주청년동맹을 창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뒤 상주청년회는 상주청년동맹의 상주지부로 전환하였다.
상주청년회의 전국 차원의 청년 운동을 살펴보면, 우선 전조선청년당대회의 주최 단체로서의 참가를 들 수 있다. 상주청년회는 1923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주최 단체로 이름을 올렸으며, 전조선청년당대회 참가를 계기를 운동의 방향을 문화 운동에서 계급 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모색하였다. 1925년 2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지침에 따라 경북지방 청년대회 발기회가 추진되자 발기 단체로 참여하였으며, 1925년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반대하는 전국연합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1920년대 상주청년회는 상주청년동맹 결성과 동시에 발전적 해체를 하여 상주청년동맹 상주지부가 되었다. 그러나 1935년 3월 도곡서당과 협력하여 상주교육협회를 설립하고 유치원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이후 다시 개별 단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상주청년회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결성된 대표적 청년 운동 단체로서 청년 운동과 사회 운동의 확산과 발전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