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구국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58
한자 新敎育救國運動
영어공식명칭 New Educatio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교육 구국 운동.

[개설]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국권을 박탈당하고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자 교육을 진흥하여 국권 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추진하였던 교육 구국 운동이다. 1905년 이후 애국 계몽 단체와 계몽 운동가들은 민족이 주체가 된 교육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사립 학교 설립에 앞장섰는데 민중이 자발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신교육구국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신교육구국운동이 전개될 무렵 상주 지역의 사립 학교로는 1906년 설립된 사립 광흥학교(廣興學校)를 비롯하여 1908년 설립된 사립 풍창학교(豊昌學校), 1909년 설립된 사립 남명학교(南明學校), 그리고 함창에 설립된 사립 창명학교(昌明學校) 등이 있다.

[전개]

경상북도는 일반적으로 유교적 전통과 규범이 공고하여 신교육 기관의 설립에는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선각적인 지식인들과 일부 진취적인 유생들은 교육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국권 회복을 달성하고자 하는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하며 근대적인 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경상북도 지방의 근대적인 학교 설립은 1906년 3월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가 1899년 4월 반포한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에 따라 「흥학훈령(興學訓令)」을 발표하면서 가속화되었다. 신태휴는 각 군에 100호 단위로 1개교를 설립한다는 원칙 아래 각 고을을 다니며 근대 학교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흥학훈령」에 힘입어 군수와 지방 유지들이 사립 학교 설립에 적극 나서 1906년 10월 기준으로 경상북도 41개 군에 100여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신태휴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방 수령의 협조, 그리고 진취적인 유생의 참여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주에는 1886년에 설립된 일종의 학계(學契)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들의 모임인 ‘연계소(蓮桂所)’가 있었다. 연계소의 설립 목적은 ‘건물을 세우고, 땅을 장만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도의를 강마(講磨)하며, 경로 효친’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연계소의 유생들은 「흥학조칙」과 「흥학훈령」에 부응하여 1906년 4월 말 “방략(方略)을 토론하고 규칙(規則)을 강정(講定)하여 흥학설교(興學設校)하는 일에 협력”하여 달라는 내용의 「연계소통일향문(蓮桂所通一鄕文)」을 내어 흥학설교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1906년 5월 2일에는 「연계소통문(蓮桂所通文)」을 내어 중등 교육 기관인 상산중학교(商山中學校) 설립에 따른 향교와 서원 유림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어 1906년 5월 20일 개교를 목표로 상산중학교찬성회(商山中學校贊成會)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1906년 6월 4일에는 중학교 과정의 사립 광흥학교 설립에 따른 「광흥학교통문(廣興學校通文)」을 광흥학교 도교장(都校長) 전승지(前承旨) 정하묵(鄭夏黙), 부교장 유학 유만식(柳萬植), 교감 유학 성식(成栻), 찬성원 주사 김희수(金喜秀), 세마 정재덕(鄭在悳), 참봉 강래희(姜來熙) 등의 이름으로 내었다.

1906년 설립된 사립 광흥학교가 언제 어디에서 개교를 하고 학생을 선발하였는지는 전하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1908년 대한협회 대구지회 총무로 대구에서 활동하던 정재덕(鄭在悳)이 귀환하여 학도를 모집하고, 교사를 초빙하여 교육에 힘을 기울이는 등 광흥학교 운영에 전력하였다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교육을 실시한 것은 1908년경으로 보인다. 정재덕·강신규·강래희 등은 광흥학교 설립 과정에서 상주의 대표적 사족 가문인 유(柳)·정(鄭)·조(趙) 3성 등 보수적인 양반 사족층의 반대를 극복하여야만 하였다.

1908년에는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의 11대 종손 조남호(趙南琥)에 의하여 사립 풍창학교(豊昌學校)가 낙동면 승곡리에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은 “남자의 긴요한 처세상 지식 기능을 가르치도록 한다”에 있었다. 교장 조남식(趙南軾)을 비롯하여 교감 1명, 사무원 1명, 교사 2명, 사환 1명 등이 재직하였으며, 교지 1,155㎡, 교사 264㎡, 교실 2실, 교사실 1실, 사환실 1실, 우물 1개 등을 갖추었고 연간 운영비는 650원 20전이었다.

1909년에는 불교계 근대 학교인 사립 남명학교(南明學校)가 남장동 남장사(南長寺)에 설립되었으며 학도는 60여 명이었다. 교사 김상숙(金相淑)이 애국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추진된 상주 지역의 신교육구국운동은 유력한 사족 가문과 유생들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상주 지역에서는 근대 학교 설립 과정에서 보수적인 양반 사족층의 반대를 극복하여야 하였지만 진취적인 유생들에 의하여 사립 학교가 여럿 설립되었고 교육에 대한 열의 또한 매우 높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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