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65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Contemporary Times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덕천

[정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해방 직후 상주 지역에서는 좌우익 간의 이념 갈등이 심화됐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6·25 전쟁 당시 상주 지역은 주요 전장 가운데 하나였고, 큰 피해를 입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상주 지역은 농업 중심의 경제가 발달하였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의 행정 구역 개편 끝에 1995년 1월 1일 지금의 상주시가 탄생하였다.

[해방과 상주]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8월 17일 경상북도 상주군에서는 지방 유지 수백 명이 모여 건국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지도자 선임 문제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18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라 할 수 있는 익찬회(翼贊會)가 설립되었다. 1946년 5월 15일에는 우익 인사들이 이른바 상주군 국민회(尙州郡 國民會)를 설립하였다. 1946년 9월 31일에는 좌익 인사들이 주도하여 상주우편국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처럼 해방 직후 상주군에서는 좌우익 간의 이념 갈등이 심화되었다.

[6·25 전쟁과 상주]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경상북도 상주군은 1950년 7월 30일부터 9월 하순까지 북한군 통치 하에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국제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한군은 전면적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상주군에 있던 북한군도 물러났다. 6·25 전쟁 당시 상주군에서 펼쳐진 주요 전투로는 화령장 전투, 이안 지역 전투, 낙동강 전투 등이 있다. 이러한 전투를 치르면서 상주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는 사망 848명, 부상 336명, 학살 73명, 납치 32명, 행방 불명 351명 등 1,640명에 이르렀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일반 주택도 3,500여 호가 파괴되었다.

[1980년대까지 상주의 변천]

1. 행정 구역

1949년 7월 4일 공포된 지방 행정 조직은 특별시·도·시·군·읍·면·리·동이었다. 경상북도 상주군의 행정 구역도 이를 따랐다. 1960년대 이후 상주군의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1966년 7월 상주군 모서면 서부출장소 등 5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7월에는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가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에 편입되었다. 1980년 12월에는 상주군 함창면함창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월에는 상주군 상주읍이 상주시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에는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가 경상북도 점촌시에 편입되었다. 1989년 4월에는 상주군 화북면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2. 정치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한국 최초의 민주제 선거였다. 이때 상주군에서는 갑·을 2개의 선거구에서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선거구 제도는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유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입후보자의 정당 추천제가 채택되었다. 1972년 유신체제 이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소선거구제가 중선거구제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경상북도 김천시·금릉군·상주군을 묶은 경상북도 제5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2명 선출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전국구로 김천시·금릉군·상주군을 묶어서 선거를 실시하였다.

3. 경제

상주군은 농업 인구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상주군은 일찍부터 과 보리 농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부터 과 보리 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 과일류와 채소류도 적지 않게 재배되었다. 상주군은 축산업도 발달하였는데, 주로 한우를 많이 사육하였다. 상주군의 상업은 전통 오일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산업화의 영향으로 오일장은 감소하였고, 상주군의 상업도 전문화·분업화·대형화하기 시작하였다. 상주군의 공업은 1960년대부터 비교적 활발하였다. 섬유·기계·비금속·화학·식료품 등의 공장이 있었다. 특히 잠업(蠶業) 공장이 큰 규모로 운영되었다.

4. 사회

상주군의 인구는 1960년대 중반까지 26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부터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중반에는 18만여 명으로 줄었다. 젊은 층의 도시 진출이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상주군은 1965년 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상주군에서도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각종 개량 사업이 실시됐다. 1986년에는 상주군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도시 기반 시설이 더욱 확충되기 시작하였다. 상주중앙시장과 농공단지의 조성, 도로 교통망의 개설, 상주시 문화회관과 공공도서관의 건립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1990년대 이후 상주의 변천]

1. 행정 구역과 정치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형 시 설치로 경상북도 상주시 7동과 상주군 1읍 17면이 통합되었다. 상주시 행정 구역은 1읍 17면 7동[행정동]으로 바뀌었다. 1998년 10월에는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상주시 중앙동이 동문동에 편입되었다. 상주시는 다시 1읍 17면 6동으로 바뀌었다. 시·군의 통합에 따라 상주군수 직제는 없어지고 상주시장 직제로 통합되었고, 시장은 민선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6월 시·도지사, 시장·군수·구청장, 시·도의회 의원, 시·군·구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처음 실시되었다. 이로써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민선 자치 시대가 열렸다.

2. 경제

상주시의 농업은 여전히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그러나 농가와 농가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주요 작물로는 을 비롯한 과일류와 채소류 등이 있다. 상주시의 축산업은 변함없이 한우 사육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상주시의 상업은 대체로 상주중앙시장 등의 전통시장과 대형화된 상점이 병립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상주시의 공업은 꾸준히 활성화되어 식료품·섬유·화학·기계 등의 공업이 발전하였으며, 특히 식료품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 이유는 과일 가공업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3. 사회

상주시의 인구는 계속하여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1996년에는 13만여 명, 2006년에는 10만여 명으로 줄었다. 2016년 현재 10만 명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계속 줄어들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상주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98년 8월의 홍수가 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상주시는 물바다가 되었고 귀중한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 손실을 입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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