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650 |
---|---|
한자 | 尙州 愚伏 宗宅 |
영어공식명칭 | Ubok Head House, Sangju |
이칭/별칭 | 우복종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90[우산리 19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영 |
건립 시기/일시 | 1743년 이전 - 상주 우복 종택 건립 |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48년 - 상주 우복 종택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8년 - 상주 우복 종택 복원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1982년 2월 24일 - 상주 우복 종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1호 지정 |
문화유산 해지 일시 | 2018년 11월 1일 - 상주 우복 종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1호 해지 |
문화유산 지정 일시 | 2018년 11월 1일 - 상주 우복 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상주 우복 종택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4년 5월 17일 - 상주 우복 종택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
현 소재지 | 상주 우복 종택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90[우산리 193-2] |
성격 | 고택 |
소유자 | 진주 정씨 종중 |
관리자 | 진주 정씨 종중 |
문화유산 지정 번호 | 국가민속문화유산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정경세의 종택.
[개설]
상주 우복 종택(尙州 愚伏 宗宅)은 1750년대 조정으로부터 사패지[왕이 내려 준 논과 밭]가 내려오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현손 정주원(鄭冑源)[1686~1756]이 건립한 종택이다. 『진주정씨세보』에 따르면, 정주원은 만년에 우산으로 들어와 엽동(燁洞)을 자호(自號)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상주 우복 종택 소장 전적류에도 “정주원은 8대를 세거하여 온 율리를 떠나 우산으로 이거를 단행”한 것으로 나온다. 주원의 손자 정종로(鄭宗魯)[1738~1816]의 문집에는 1743년 “우산 본댁으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이 있어 적어도 1743년 이전에 종택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종가’라고도 부른다.
상주 우복 종택은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고, 2018년 11월 1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제31호에 의해 해지되고, 국가민속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변경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다.
[위치]
상주 우복 종택은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채릉산로 799-90[우산리 193-2]에 있다. 우산리 우복산 기슭에 있는데, 앞쪽으로 이안천이 흐르고 멀리 천마산[시루봉]을 바라보면서 동향하고 있다. 상주 우복 종택보다 먼저 건립된 계정과 대산루가 이안천 북쪽에 있다. 정경세 생전에 건립된 별서 건축 부분은 주변 경관이 수려한 천변에 있다. 정경세 사후 5대손 대에 이르러 사패지를 하사받은 다음, 뒤쪽 남서쪽 높은 곳에 상주 우복 종택을 건립하였다.
[변천]
상주 우복 종택은 1948년 화재로 대문채가 불에 탔고, 1988년 솟을대문 5칸으로 복원하였다.
[형태]
상주 우복 종택의 배치는 계정, 대산루 남쪽 언덕 위의 종택 영역과 담장 밖 남쪽에 입재 정종로를 배향하는 별묘 영역으로 구분된다. 종택 영역은 ‘ㄱ’ 자형 정침을 중심으로 북쪽에 행랑채[아랫채]가 있고, 전면인 동쪽에 사랑채가 있는 3동 튼 ‘□’ 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행랑채 북쪽에 별도의 방형 담장 안에 우복 불천위 사당이 있고, 사랑채 전방에 솟을대문이 있다. 별묘로 출입하기 위한 협문이 안채 남쪽 담장에 있다. 별묘 앞쪽에는 토담초가 고직사가 있는데, 과거 외거 노비가 거주한 가랍집으로 추정된다. 배치는 조선 후기 상류 주택의 제반 특성을 취하되 문경 지역을 포함한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 상류 주택의 튼 ‘口’ 자형 평면 유형을 하고 있다.
상주 우복 종택은 안채, 행랑채, 사랑채, 사당, 솟을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지한 지형에 맞춰 대략 4단으로 터를 닦아 앉혔다. 안채는 정면 4간, 측면 5간에 ‘ㄱ’ 자형 평면이다. 안마당에 면한 4간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2간통의 건넌방, 좌측에는 익사와 연결되는 2간통의 안방을 중심으로 뒤편에 윗방이 있고, 아랫부분에 2간통 부엌이 있다. 부엌 상부 2칸에는 안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유산고]이 설치되어 있고, 안마당 쪽으로는 창을 두었다. 안방의 안마당 쪽 창호 밖에는 쪽마루를 두어 툇마루가 이어져 외부에서 직접 방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다. 주상부는 민도리 형식이고, 한식 토벽에 구들방에는 살문, 대청 뒷벽에는 머름중방 위에 널창을 달았다. 또 안방, 건넌방과 대청 샛벽에는 각기 외여닫이 굽널살문을 달았고, 정지 앞문은 쌍여닫이 띠장널문이다. 구조는 사랑채보다 한 단 높은 지형에 자연석 기단을 쌓아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간결한 민도리 형식이며, 지붕 가구는 대청 상부에 삼분변작법에 파련대공을 둔 5량가이고, 부엌은 3량가이며, 지붕은 팔작에 한식 기와를 이었다.
상주 우복 종택의 행랑채는 안채 북쪽에 바짝 붙어 있는데, 며느리가 들어오면 안채에 기거하던 조모가 행랑채에 거처하였다고 전한다. 위치로 보아 대문채가 소실된 후 종택의 출입 동선에서 아래채가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되면서 현재까지 행랑채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평면 구성은 온돌방 2간, 가운데 마루가 깔린 광과 토상의 광과 도장이 연결된 5칸 규모의 ‘一’ 자형 홑집 형식으로 서향이다. 근래 주거 환경 개선 사업으로 가운데 광 부분이 욕실로, 온돌방이 2간통으로 변경되었다. 과거 사진에서 광은 사당으로 가는 통래칸, 고방과 광은 안마당 쪽으로 쌍여닫이 널문을 둔 것으로 보인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주상부는 민도리 형식이고, 지붕 가구는 3량 구조에 홑처마 맞배에 한식 기와를 이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중당협실형 ‘一’ 자형에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 2칸을 중심으로 북쪽에 구들방 1칸, 남쪽에 구들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실의 앞쪽 전체에는 쪽마루와 계자각헌함을 설치하여 격식을 차렸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지붕 가구는 3량가이다.
상주 우복 종택의 정경세를 모시는 불천위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이다. 구조는 자연석 주춧돌 위에 툇기둥만 두리기둥에 초익공 형식이고 이외는 네모기둥에 민도리 형식으로 차별성을 두고 전면 각 칸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가운데 출입문 위에는 1796년(정조 20) 내린 사제문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좌측부터 불천위 신위 고조, 증조, 조신위를 배설하고 오른쪽 벽에 기대어 부 신위를 설치하여 불천위를 포함한 4대 신위를 배설하였다. 정종로 불천위 사당은 우복 불천위 사당과 동일한 규모, 평면, 구조이고, 내부 어칸 뒷벽에 기대어 정종로의 신위를 배설하였다.
[의의와 평가]
상주 우복 종택은 조선 후기 가문의 경영 방식과 지역 사회에서 성장 과정, 종택의 건립 및 입지 양상과 배치 구성 등 건축사적 특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