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724
한자 商山鄕彦錄
영어공식명칭 Sangsan Hyangeonrok
이칭/별칭 『상주향안』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경천로 684[삼덕리 361]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유기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장처 상주박물관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84[삼덕리 361]지도보기
성격 향안
저자 상주 유향소[상주 향청]
권책 2책[상권 260면, 하권 166면]
규격 76.5㎝[세로]|47㎝[가로]

[정의]

1617년 작성된 조선 시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향안.

[개설]

조선 시대 경상북도 상주 지역 유향소(留鄕所)·향청(鄕廳)의 향원(鄕員) 명부이다. 유향소는 조선 시대 재지사족이 주도하던 향촌 자치 기구로서, 조선 후기에는 향청이라 불렸다. 재지사족 층은 유향소 운영을 통하여 향촌 교화, 향리 규찰, 수령 자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향촌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향안은 이러한 유향소 구성원의 명부로서, 전통적인 재지사족 층만이 배타적으로 입록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신향(新鄕)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계층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상주 지역 향안은 ‘상산향언록(商山鄕彦錄)’이라는 표제로 엮여졌다. 향청이 폐지된 후 상주향교로 이관되었다가, 현재는 상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저자]

『상산향언록』는 조선 후기 경상도 상주목 유향청[향청]에서 편찬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조선 시대 상주목과 같이 재지사족의 정착이 활발한 곳은 16세 중엽 이전부터 향안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상산향언록』 상권 서두에 수록된 주세붕(周世鵬)·이준(李埈)·정경세(鄭經世)의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에는 향안 작성의 경위와 유래 등을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는 늦어도 1551년 이전부터 향안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기존의 향안이 소실됨에 따라 고을 부로(父老)들이 『상주향안구적(尙州鄕案舊籍)』을 작성하였으나, 과거의 기억에 따라 작성하였기에 누락된 인사가 많고 연도와 월의 선후가 불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이에 연도와 월, 그리고 차서(次序)를 상세히 살피는 규례에 준거한 향안, 즉 『상산향언록』이 1617년 작성되었으며, 이후 향안의 입록은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형태/서지]

『상산향언록』의 크기는 상권과 하권 모두 세로 76.5㎝, 가로 47㎝이며, 분량은 상권 260면, 하권 166면이다.

[구성/내용]

『상산향언록』은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상권에는 경상도 상주목 출신 인사들의 서문과 발문에 이어 입록자 명단인 좌목(座目)을 수록하고 있다. 상권의 좌목은 1595년의 ‘상주향안구적’에서부터 1727년까지 총 16회에 걸쳐 입록된 향원 총 1,972명을 기록하고 있으며, 입록자의 성명·직역 및 관직이 기재되어 있다. 소수이지만 삭적(削籍)된 경우도 확인되며, 세주로 삭적의 사유를 부기하였다. 하권은 상권에 이어 1749년부터 18세기 후반까지의 5회에 걸친 좌목, 그리고 20세기 초반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의 좌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록 인원은 총 1,305명이다. 『상산향언록』의 좌목에 입록된 성씨로는 김씨(金氏), 이씨(李氏), 조씨(趙氏), 황씨(黃氏), 홍씨(洪氏), 강씨(姜氏), 정씨(鄭氏), 신씨(申氏), 고씨(高氏), 강씨(康氏), 성씨(成氏), 노씨(盧氏), 송씨(宋氏), 채씨(蔡氏), 류씨(柳氏) 등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좌목에 입록된 성씨들이 향안 작성을 주도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주로 16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집중된 『상산향언록』의 입록 추이는 시기별로 현저한 차이가 나는 특징이 있다. 향안 작성의 시작인 16세기 중엽부터 전성기인 17세기 전반기까지 입록인의 경우 중앙의 고위 문관직, 서반(西班) 체아직(遞兒職), 문산계(文散階), 생진(生進), 충순위(忠順衛), 충의위(忠義衛) 등 다양한 병종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 사림의 중앙 진출이 활발하였던 당시의 사회적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유학(幼學)의 비중이 급증하며, 입록의 대규모화 역시 나타나고 있다. 이는 1654년 기존 향임의 처우를 향리로 격하시키는 영장사목(營將事目)의 시행으로 인한 사족의 향임 기피 현상과 향안의 권위 약화, 17세기 이후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따라 성장한 신흥 세력의 향안 입록 도모, 중앙 권력의 벌열화에 따른 재지사족의 관로 진출 차단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한편 경상도 상주는 퇴계학파의 영남 남인 계열이 주류를 이루던 곳이었으나, 정경세의 사위가 된 서인계 산림인 송준길(宋浚吉)의 영향, 노론계 수령의 부임 등으로 노론계가 점차 확산되었으며 1702년에서는 영남 최초의 서인계 서원인 흥암서원(興巖書院)이 건립될 만큼 영남 내 노론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노론계의 확산과 상주 재지사족의 분열은 향안의 작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향론의 분열로 합의에 의한 향안 작성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18세기 후반부터는 더 이상 종전과 같은 규모의 입록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상산향언록』 이외에 『정묘가록(丁卯加錄)』, 『흥암서원향안속록(興巖書院鄕案續錄)』 등과 같은 노론 주도의 별도 향안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상산향언록』은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동향과 변화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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