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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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民秉 |
영어공식명칭 | Jung Minbyung |
이칭/별칭 | 문호(文好),기주(箕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석현 |
출생 시기/일시 | 1800년 - 정민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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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2년 - 정민병 돈녕부도정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82년 - 정민병 사망 |
출생지 | 우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
거주|이주지 | 우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
묘소|단소 | 정민병 묘소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진양(晉陽) |
대표 관직|경력 | 돈녕부도정 |
[정의]
조선 후기 상주 출신의 문신.
[가계]
정민병(鄭民秉)[1800~1882]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자는 문호(文好), 호는 기주(箕疇)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예모(鄭禮模)이고, 할아버지는 정성로(鄭成魯)이다. 아버지는 정상관(鄭象觀)이고, 어머니는 남한조(南漢朝)의 딸 의령 남씨(宜寧 南氏)이다. 부인은 한성부우윤 박광석(朴光錫)의 딸 순천 박씨(順天 朴氏)이고, 아들은 정급우(鄭及愚)·정경우(鄭慶愚)·정직우(鄭直愚)·정백우(鄭百愚)이다.
[활동 사항]
정민병은 1800년(정조 24) 상주목 우산리(愚山里)[현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정상관에게 학문을 익혔고, 이후 『서경(書經)』 및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특히 정통하였다고 한다. 1862년(철종 13) 고을에 전염병이 돌자 구휼 대책을 논의하였고, 1868년(고종 5) 영남에서 사도세자의 일로 상소를 추진할 때 수임(首任)으로 추천되었다. 1871년 서원 훼철을 반대하는 만인소(萬人疏)에서도 소수(疏首)[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를 맡았다.
정민병은 만년에 추애(湫隘) 지역에 기주정사(箕疇精舍)를 짓고 생활하였다. 1882년 경연에서 추천을 받아 선공감감역에 제수되고 곧이어 돈녕부도정에 올랐으나 얼마 뒤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민병의 저술로는 문집인 『기주집(箕疇集)』 8권 4책이 전한다.
[묘소]
정민병의 묘소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