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955
한자 姜順必
영어공식명칭 Kang Soonpil
이칭/별칭 강병수(姜秉秀),강병수(姜秉洙),강병수(姜炳洙),강병수(姜秉洙),강순필(姜順弼)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강순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강순필 이강년의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강순필 풍기광복단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강순필 광복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7년 11월 10일 - 강순필 친일 부호 장승원 처단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강순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강순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3월 1일연표보기 - 강순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소암리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소암리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활동지 풍기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칠곡 - 경상북도 칠곡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의병|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강순필(姜順必)[1884~1921]은 일제 강점기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광복회(光復會)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강병수(姜秉秀)·강병수(姜秉洙)·강병수(姜炳洙)·강병수(姜秉洙)·강순필(姜順弼) 등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강순필은 1884년 지금의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3년 상주 출신 채기중(蔡基中)의 주도로 풍기에서 결성한 풍기광복단에 참여하였다. 당시 풍기광복단의 활동 목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이었다. 강순필은 1916년 10월 채기중·김낙문(金落文)·이식재(李湜宰)·조우경(趙禹卿)·권재하(權在河) 등과 함께 강원도 영월의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고, 전국 각지의 자산가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강순필은 1915년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대구에서 광복회(光復會)가 결성될 때 참가하였고,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기지로 보내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거점을 중심으로 적시(適時)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행동 지침은 비밀(秘密)·폭동(暴動)·암살(暗殺)·명령(命令)의 4대 강령이었고 거점으로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기지 건설, 의열 투쟁으로 총독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이었다.

강순필은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서 채기중·유창순(庾昌淳)·임봉주(林鳳柱)와 함께 1917년 11월 10일 칠곡군의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다. 장승원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으나, 박상진( 朴尙鎭 )이 만든 광복회의 군자금을 요청을 거부하고 이를 일제에 밀고하려 하였다. 당시 광복회는 사형선고문을 붙여 광복회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강순필은 1918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고, 1921년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묘소]

강순필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순필의 공적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