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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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元佑 |
영어공식명칭 | Yu Won-woo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3월 13일 - 유원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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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0년 - 유원우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유원우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6월 - 유원우 재동경협동조합운동사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4월 - 유원우 상주협동조합 발기인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5월 28일 - 유원우 재동경협동조합사 제3회 정기총회에서 재무부 임원으로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 유원우 학우회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유원우 상주교육협회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2월 24일 - 유원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유원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상촌리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883 |
학교|수학지 | 대구고등보통학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00[황금동 9] |
학교|수학지 |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 |
활동지 | 신간회 동경지회 - 일본 도쿄 |
활동지 | 상주교육협회 - 경상북도 상주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상주교육협회 이사|신간회 동경지회 간사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유원우(柳元佑)[1902~1938]는 1902년 3월 13일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883에서 태어났다. 3·1 운동 직후인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인 순사의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이로 인하여 대구경찰서에 3개월 구금되었고, 학교에서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뒤 일본 도쿄[東京]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유원우는 1926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 140여 명과 함께 무너져 가는 국내 농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재동경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재무부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도쿄에서 학생, 노동, 사상운동 등 다양한 단체들의 통일과 통합을 위하여 설립된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 활동 중 1927년 4월 고향인 상주에서 상주협동조합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다시 일본 도쿄로 돌아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 홀에서 설립된 신간회 동경지회에 참여하고, 간사단의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5월 28일 도쿄에서 열린 재동경협동조합사 제3회 정기총회에서 전진한(錢鎭漢), 김민직(金敏稷) 등과 함께 재무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재동경협동조합사 총회에서는 하기 사업과 신간회 지지에 대하여 토의하고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유원우는 1927년 7월 재동경협동조합운동사의 국내 각지 순회 선전을 위하여 김원석(金源碩), 유영복(劉永福) 등과 함께 제1대에 편성되었다. 7월 18일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상주청년회와 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의 지국 후원 아래 사립 보광강습회(普光講習會) 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협동조합운동과 세계적 대세’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 충남 공주에서는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27년 9월 4일 경북 상주에서 개최된 신간회 상주지회 설립 대회에 참가하고, 신간회 동경지회를 대표하여 축사를 진행하였다.
1928년 여름방학 때 협동조합운동사 선전단을 구성하여 국내 순회강연 활동을 벌였다. 강연 제목은 ‘협동조합의 사적 고찰과 세계적 대세’,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 등이었다. 아울러 상주에서 열린 유학생 강연회에서는 ‘변증법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유원우는 1929년 학우회의 주요 임원들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학우회 활동이 침체되자 학우회 회원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집행위원회’로 개편하고, 대표가 되었다.
유원우는 1931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32년 고려국제무역회사 지배인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5년 3월 13일 상주청년회와 도곡서당 등이 조직한 상주교육협회에 참여하고, 상주교육협회가 설립한 유치원의 이사가 되었다.
유원우는 1938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묘소]
유원우의 묘소는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원우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