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139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이칭/별칭 유학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순한

[정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전개된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개설]

유교(儒敎)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공자, 맹자 등 유가의 정치 사상과 학문 수양, 그리고 의례 등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철학 사상이자 생활 윤리라 할 수 있다. 삼국 시대 전기에 도입된 이래 개인과 가족, 국가 전체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상주 지역의 유학 역시 우주의 원리를 궁구하고 윤리를 실천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여 왔다.

[고대 상주의 유학]

공자의 경학은 삼국 시대 한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삼국 시대에 신라는 682년(신문왕 2) 국학을 설치하여 고구려·백제보다 선진 문물 수용이 빠르다. 그중 신라에서 상주가 지정학적으로 가장 먼저 타국의 문물을 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상주는 계립령, 죽령 개통으로 인하여 사통팔달하여 상주 유학이 선진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삼국 통일기에 상주가 백제 패망의 본영[무열왕 금돌성 주둔]이었기 때문에 김유신(金庾信)[595~673], 김품일(金品日), 죽지(竹旨) 등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한 명장, 고관들이 상주에 주둔하였고, 자연스럽게 유학이 일찍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상주 복룡동에서 출토된 납석제 유물에 새겨진 7인의 인명 중 ‘답리랑(沓里娘)’ 등 다섯 명은 ‘사벌주희(沙伐州姬)’의 딸들로 추정된다. 또 생활 용기에 한자를 빌어 우리말의 이름을 표기할 정도로 한자 운용이 자유로웠던 것은 상주 유학의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후 여말선초에 당나라 유학승으로 고승들이 상주 사찰에 주석(住錫)함으로써 유불 화해(和解)사상을 수용한 것도 상주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세 상주지역 유교 문화의 발전과 성장]

10세기 고려 시대에 최승로(崔承老)[927~989]는 상소문에서 “불교를 행하는 자는 수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유교를 행하는 자는 치국으로써 근원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유교 사상을 중시하는 치국이 선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성종은 987년(성종 6) 전국 12목에 경학박사, 의학박사 각 1인을 파견하여 엄히 교육하게 하고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하여 10세기 이후부터 상산 김씨, 상주 박씨 가문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선비들이 속출하였다. 이후 성리학이 상주에 유입된 것은 대략 13세기 말이었다. 그 이유는 신진 사대부 안향(安珦)[1243~1306]이 1275년(충렬왕 원년) 상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3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성리학의 합리주의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 조선이 건국되면서 숭유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화되었다.

상주 지역은 소백산 남쪽에 있어 고려나 조선 시대에 북쪽으로부터의 대외적인 잦은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비교적 안정된 곳으로 학문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또한 계곡 평야를 비롯하여, 강가나 냇가 인근에 비교적 평야가 많아 수리 활용에 이점이 많았다. 따라서 다른 지방보다 일찍 이앙법을 도입하여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리학이 발전하였다. 조선 초기 상주 지방 성리학 보급의 기틀을 제공한 사람은 김숙자(金叔滋)[1389~1456]이다. 김숙자는 길재(吉再)[1353~1419]의 문인으로 상주향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아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영남 사림파의 종장으로 문하에는 김굉필(金宏弼)[1454~1504]을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문도들 가운데 상주, 함창에 거주한 홍귀달(洪貴達)[1438~1504], 표연말(表沿沫)[1449~1498], 채수(蔡壽)[1449~1515] 등은 모두 조선 전기에 상주에서 성리학 연구와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홍귀달은 무오사화 때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하여 유배 중 교살당하였다. 표연말은 소릉(昭陵)[문종비 현덕왕후릉] 추복(追復)에 관한 사실을 사초에 적은 것과 김종직의 행동을 미화하였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 죽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채수는 갑자사화 때 파직되었으나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황의 제자들 가운데 1580년(선조 13) 류성룡(柳成龍)[1542~1607]은 목사로 부임하여 향교에서 성리학을 교육시킨 결과 유능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유학 보급과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이황 학문을 계승하여 류성룡의 학문을 이은 대표적인 적전제자가 바로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이다. 류성룡정경세를 비롯하여 향교의 교생들을 데리고 한 달에 두 번 초하루와 보름날 문묘를 배알하여 유학의 기초를 다져 준 선현들을 기린 다음, 강당 명륜당에 앉아서 교생들과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심도 있게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7세기 상주의 유학은 류성룡 학문을 계승한 상주 출신의 뛰어난 학자 정경세를 중심으로 상주 지역 학문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정경세류성룡의 수제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정도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영남의 퇴계 직전제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후 재전의 제자들이 지역 사회의 중심이 되었을 무렵 정경세는 상주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류성룡의 아들 류진의 경우 상주로 거주지를 옮겨 정경세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고, 정경세의 손자 정도응류진에게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았다. 정도응류진의 사위가 되어 그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이렇게 하여 이황-류성룡-정경세-류진-정도응으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상주 지역의 정경세 대표 문인으로 황뉴(黃紐), 이전(李㙉), 이준(李埈), 조우인(曺友仁), 조희인(曺希仁), 전식(全湜) 등을 꼽을 수 있다. 상주 성리학은 퇴계학을 계승한 정통 남인 지역이지만, 서인 내지 노론과도 부분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지역이기도 하다. 한 예로 정경세는 남인으로 매몰되지 않고 서인 송준길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서인 계열에 속하는 김장생(金長生), 이덕형(李德馨),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 신익성(申翊聖) 등 중앙의 명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이들 가운데에서 특히 당시 율곡학파의 중심 인물인 사계 김장생과도 교분을 맺으면서 예설(禮說)과 경의(經義)에 관한 잦은 논의를 통하여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간 학문적 견해의 간격을 좁히고자 하였다.

18세기 상주의 유학은 상당히 위축된 시기였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내지 노론으로 이어진 붕당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영남 남인은 중앙 진출이 좌절되었고, 숙종 대에 일시적으로 남인이 정국을 장악하였을 때도 주도권은 근기 남인들이 장악하여 영남 남인들의 역할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은 중앙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더욱 위축되었다. 이 시기 상주 지역 학문적 분위기도 이황 학문을 고수하고 반추(反芻)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당시 상주의 학문은 정경세의 6대손 정종로(鄭宗魯)[1738~1816]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결집되어 학문 교류가 이루어졌다. 정종로는 이상정, 박손경, 최흥원, 남한조 등 당대 영남의 대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정종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 유학 연구에만 전념하고자 하였으나, 채제공(蔡濟恭)[1720~1799] 등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로 특진하였다. 60세에 이르러 함창현감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채제공은 정종로를 두고 “경학과 문장이 울연(蔚然)하여 영남의 제일인자”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정종로의 뛰어난 학문은 상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수는 약 250명이 된다.

[근현대 상주 유학의 변화와 과제]

상주의 유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유학의 정맥이 흐르는 곳으로 경상북도의 어느 지방보다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다. 유학의 본향이라는 명성에 맞는 많은 수의 유회(儒會)가 조직되어 있고,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유교의 영향력은 새로운 문물과 가치관의 유입으로 점차 감소하였다. 이는 새로운 교육 제도가 시행되고, 과거 시험이 폐지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된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올바른 전통적 유교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상주 지역의 유림도 전통 유교를 계승·발전시키며, 유교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성균관유도회 산하 상주지역지부와 담수회, 박약회 상주지회가 있다. 성균관유도회는 내부 갈등을 해소하고 1970년 전국대표자대회를 통하여 유도회를 재건하였으며, 1994년 유도회 정관을 개정하여 2022년 6월 출범식 개최한 후 유교의 현대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박약회 상주지회는 1995 12월 18일 발족하여 16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상주 유학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상주 담수회는 상주 지역에 도의(道義)와 윤리 사상을 널리 전파하여 미풍양속을 조장하고, 민족 통합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1987년 결성되어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상주 유학은 급속한 사회 변화로 인한 새로운 가치관의 확산으로 과거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유교를 계승·발전시키는 데는 더욱 어려움이 있다. 새로운 세대에게 유교의 가치관을 알려 주고 동참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하는 것은 상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유교 전반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현재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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