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1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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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호랑이 굴에서 구한 손자」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곽현희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호랑이로부터 손자를 구한 김 선비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는 손자를 물어간 호랑이를 김 선비가 이치를 따져 퇴치한다는 내용의 민담이자 호랑이 퇴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는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2016년 상주문화원에서 간행한 『상주 이야기』 2권에는 「호랑이 굴에서 구한 손자」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상주에 김 선비라는 사람이 살았다. 김 선비는 처음에 관동(關東)의 산중에서 아들 부부와 셋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들을 잃게 되었는데, 다행히 복중에 있던 손자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 손자가 태어나던 날 김 선비는 하늘에 빌었다. “우리 가문이 멸족되지 않기를 원하오니 손자를 별 탈 없이 잘 기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김 선비는 며느리가 살림을 살며 수발을 드는 사이 어린 손자의 젖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보살폈다. 손자가 울면 며느리를 불러 젖을 먹였고,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김 선비가 문을 연 채로 바람을 쏘이며 잠이 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밤이 깊었고 손자도 보이지 않았다. 김 선비는 촛불을 밝히고 며느리 방을 비롯하여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 손자를 잃으면 우리 가문은 멸족이다. 나 또한 명을 부지하기 어렵다’라고 생각하였다. 집안을 뒤지던 김 선비는 밤중에 호랑이가 왔다 간 자취를 찾아냈다. 그 순간 뒷산 바위굴에 있는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호랑이의 소행이라고 짐작한 김 선비는 뒷산 바위굴로 달려갔다. 호랑이 굴 앞에 이르니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동정을 살피니 마침 어미 호랑이는 어디를 갔는지 나가고 없고, 새끼 호랑이 셋이 손자와 함께 있었다. 손자는 호랑이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김 선비는 곧바로 굴로 들어가 손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호랑이 새끼 세 마리를 때려죽이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김 선비는 며느리를 불러 “애가 보채니 젖을 물려라” 하고 말하였다. 며느리는 아들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호랑이 굴에 있었던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어미 호랑이가 울 밖에 와서 날뛰어 대며 으르렁거렸다. 김 선비는 칼을 빼어 들고 밖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이치를 들어 호랑이를 질책하였다. 그렇게 호랑이와 대치한 채로 사흘이 지나자 동네 사람들이 포수를 배치하여서 호랑이를 잡았다. 호랑이를 퇴치한 후 김 선비는 “이곳은 자손을 키울 곳이 못 된다”라고 하며 상주로 이사하였다. 그 뒤 손자를 가르치니 손자는 글짓기에 능하고, 인성도 훌륭한 인물로 자라났다.
[모티프 분석]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의 주요 모티프는 ‘호랑이에게 잡혀간 손자’, ‘호랑이와의 대결’ 등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았다. 그래서 설화 속에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호랑이와 호랑이를 퇴치하는 이야기가 많이 전하여지고 있다. 상주 지역에 전하여지는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도 「정무수와 호랑이」, 「호의장군과 소천교」 등과 마찬가지로 호랑이와 대결하는 내용이다.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의 특이한 점은 호랑이에게 대적하기 위하여 선비가 이치(理致)를 따져 묻는다는 것이다. 호랑이를 퇴치하는 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따라 호랑이를 퇴치하는 수단이 달라진다. 주인공이 승려일 경우에는 신통력이나 법력이 사용되고, 유학자인 경우에는 유학의 이치나 유학의 이치를 담은 문자가 호랑이 퇴치의 수단이 된다. 「호랑이 굴에서 손자를 구하다」는 선비가 주인공이므로 유교 윤리에 따른 이치로 호랑이에게 대적하는 것이다. 선비와 호랑이의 대결은 이치로 상징되는 유교적 이념과 짐승인 호랑이로 상징되는 야만의 대결이다. 이야기에서는 사흘의 접전 끝에 포수의 도움으로 선비가 승리하는데, 야만이 유교의 이치로 다스려진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