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402
한자 薛公瓚傳
영어공식명칭 Seolgongchanjeon
이칭/별칭 「설공찬이」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449년 - 채수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515년 - 채수 사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8년 8월 3일 - 나재 채수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나재 채수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나재 채수 신도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지정
배경 지역 쾌재정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이안리 지도보기
배경 지역 나재채수신도비 -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 지도보기
배경 지역 임호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신흥2길 19-8[신흥리 377]지도보기
성격 소설
작가 채수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가 상주에서 지은 한문 소설.

[개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蔡壽)[1449~1515]가 상주 쾌재정(快哉亭)에서 창작하였다고 알려진 한문 소설이다. 윤회화복(輪迴禍福)을 다루어 문제가 된 내력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올라 있어서 일찍부터 알려졌다. 오랫동안 소설의 실물을 볼 수 없다가 1996년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 뒷장에서 「설공찬이」라는 제목의 국문본 일부가 발견되어 비로소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신을 인정하고 여성을 옹호하며 군주의 권위를 격하시키는 등 당대 이념에 배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공찬전」을 지은 채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나재 채수 신도비는 1998년 8월 3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으며,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되었다.

[구성]

「설공찬전」의 제목을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고 기록하고,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기록하였으나 현재 전하는 국문본의 제목은 「설공찬이」이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제3책의 뒷장에 13쪽 분량의 내용만 전하고 있다. 도중에 필사가 중단되어 후반부에 어떤 내용이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내용]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딸은 혼인하였으나 자식 없이 바로 죽고, 아들 설공찬은 어릴 때부터 문장과 글쓰기에 뛰어났지만 나이 스물에 장가들지 않고 병들어 죽었다. 설충란은 설공찬이 죽은 후 아들을 불쌍히 여겨 신주를 모시고 3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삼년상을 마친 후 무덤 곁에 신주를 묻었다.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에게는 아들 설공침이 있었다. 그런데 설충란의 죽은 딸의 혼령이 설공침에게 들어가 설공침이 병이 들고 말았다. 설충수가 귀신 쫓는 김석산을 불러 조처를 하자 귀신이 자신은 계집이라 이기지 못하겠다며 오라비 설공찬을 데려오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와서 사촌동생 설공침에게 들어가 수시로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설공침은 오른손잡이였는데 설공찬의 혼이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왼손으로 밥을 먹었다. 이유를 물으니, 저승에서는 다 왼손으로 먹는다고 대답하였다. 설공찬의 넋이 오면 설공침은 마음과 기운을 빼앗겨 괴로워하였다. 설충수가 아들을 안타깝게 여겨 김석산을 다시 불렀다. 그러자 설공찬의 넋이 대로하여 설공침을 더욱 괴롭게 하였다. 설충수가 두려워하며 다시는 김석산을 부르지 않겠다고 하였다.

하루는 설공찬이 편지를 보내 사촌동생 둘을 불렀다. 설공찬의 넋이 설공침의 몸에 들어와 자신이 사촌들과 이별한 지 다섯 해가 지났다고 말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설공찬의 넋에게 저승 기별을 물어보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승은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이며 중국과 모든 나라 죽은 사람이 다 모여 수를 셀 수 없다. 임금은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 생활에 대하여서 묻고 책을 살펴 심판하는데, 설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할아버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설위는 이승에서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하여 저승에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승에서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을 하고, 이승에서 비록 여자의 몸이었어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아 잘 지낼 수 있다. 이승에서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에게 충성으로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반역자는 지옥에 들어간다. 적선을 하느냐, 적악을 하느냐에 따라 이승과 저승의 삶이 달라질 수 있고 자손들도 영향을 받는다.

염라왕이 있는 궁궐은 장대하고 위엄이 매우 성하여 비록 중국 임금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하루는 성화(成化) 황제가 신하 애박이를 염라왕에게 보내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를 한 해만 잡아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염라왕이 한 해는 너무 많으니 한 달만 주겠다고 하자 애박이가 다시 한 해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염라왕이 몹시 화를 내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자신의 권한이라 하며 거절하였다. 당황한 성화 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성화 황제의 신하를 잡아다 손을 삶으라고 하였다.

[특징]

「설공찬전」은 조선 왕조 최대의 필화 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1511년(중종 6) 9월 2일조 이하의 기사에 사건의 전말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설공찬전」은 윤회화복에 관한 이야기로서, 경향 각지에서 소설의 내용을 믿어 한문으로 베끼고 국문으로도 번역하여 전파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설공찬전」이 민중을 미혹하게 한다는 이유로 중종에게 「설공찬전」의 수거를 허락하여 줄 것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되는 경우 처벌하게 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마침내 왕명으로 모조리 수거되어 불태워진 작품이다. 「설공찬전」 관련 파동은 작품 내외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품 내적으로는 당대의 지배 이념과 배치되는 내용을 마치 실화인 것처럼 기술한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작품 외적으로는 사회적 문제가 될 만큼 소설이 많이 향유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경계를 담은 것이다. 최근 연구에서는 「설공찬전」의 서사가 실제 사건에 기반한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고, 채수가 귀신 이야기를 사실로 인지하고 기록하였다고 보아 「설공찬전」의 장르가 필기와 더욱 친연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설공찬전」이 도교 서사의 전통과 관련 있다고 보고, 「설공찬전」은 감통의 특수 형태인 빙의 경험을 서사화한 작품이며 여성에 대한 숭배와 존중 역시 도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의의와 평가]

「설공찬전」은 한문으로 창작되었지만 당대에 국문 번역본이 유통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00년이나 앞선 작품이다. 「설공찬전」 국문본은 이후 국문 소설의 창작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내용이 독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에 조정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우리 고전 소설 중 대중적 인기를 끈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설공찬전」은 귀신이나 저승을 소재로 하고 귀신이나 저승이 실제로 있다고 믿도록 하였다. 또 저승의 심판을 이유로 하여서 남녀의 차별을 반대하고 군주의 권위를 격하시켰다. 유교에서는 최상의 지위에 있다고 받드는 황제가 염라왕과의 대결에서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하였다. 모든 것이 당시의 지배 이념과는 맞지 않았다. 통치 질서에 대한 비판을 과감하게 하여서 소설다운 긴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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