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429
한자 慶尙道邑誌 尙州牧邑誌 咸昌縣邑誌[1878]
영어공식명칭 Gyeongsang-do Eupji Sangju-mok Eupji Hamchang-hyun Eupji[1878]
이칭/별칭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재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 편찬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세종로 1-57]
소장처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명륜3가 53-21]
성격 읍지
편자 상주목사 박헌양(朴憲陽)|함창현감 조진억(曺鎭億)
행자 10행 20자
규격 23.4㎝[세로]|15.5㎝[가로]

[정의]

1878년에 편찬된 경상도 상주목함창현의 관찬 읍지.

[개설]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1878년(고종 15)에 편찬한 『경상도읍지』 전14책의 일부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9년 6월 14일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반출하였다가 100년 만에 돌려받은 환수 문화유산이다. 원래 이문원(摛文院)에 있던 다른 지역의 읍지와 달리 열고관(閱古觀)에 있었다. 이문원에 있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 전20책 대신 가져간 읍지이며, 읍지의 유형이 다양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저자]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는 상주목사 박헌양(朴憲陽)과 함창현감 조진억(曺鎭億)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편찬/간행 경위]

『경상도읍지』 는 경상도 기장현(機張縣)과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의 내제,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의 권말 기록을 통하여 1778년(고종 15) 7월경에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전14책이지만, 4,520면으로 전20책인 『경상도읍지』[1832]의 3,680면보다 분량이 많다. 비교적 내용이 풍부하고, 시문을 많이 수록하였기 때문이다. 편찬을 주도하였던 경상도관찰사는 이근필(李根弼)[1816~1882]로 확인된다.

[형태/서지]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의 크기는 세로 23.4㎝, 가로 15.5㎝이며, 오침안정법(五針眼訂法)으로 선장(線裝)하였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고, 주(註)는 쌍행(雙行)이다. 본문 중 「상주목읍지」는 63장 126면으로 제45책에 성주목과 함께 성책되어 있다. 「함창현읍지」는 33장 66면이며 봉화현·청하현·언양현·진해현·진보현·함창현·지례현 순으로 제42책에 합철되어 있다. 각각 49장 98면, 24장 48면인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32]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구성/내용]

「상주목읍지」 는 지도, 상주목읍지 목록(尙州牧邑誌 目錄), 건치 연혁, 속현(屬縣), 군명,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坊里), 고적, 형승(形勝), 관애(關阨)[관액], 봉수(烽燧), 호구(戶口), 전부(田賦), 봉름(俸廩), 군액(軍額), 진공(進貢), 토산,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 군기(軍器), 제언(堤堰), 교량(橋梁), 도서(島嶼), 장시, 공해(公廨), 학교, 단묘(壇廟), 누정, 도로, 역원, 관적(官蹟), 과거(科擧), 인물, 충절(忠節), 효행, 열행, 능묘(陵墓), 제영(題詠), 책판(冊板)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 수록 항목과 비교하면 진보(鎭堡)·불우(佛宇)·목장은 생략하였으며, 수록 순서도 일치하지 않는다. 호구 원호 1만 7877호, 인구 6만 5035명으로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와 같다.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 학교 항목에 실었던 충렬사(忠烈祠)와 충의단(忠義壇)을 단묘로 옮겼으며, 관적은 신라 김유신부터 김석근(金奭根)까지이다. 김석근은 1876년(고종 13년)에 부임한 인물이다. 후임자인 박헌양은 1877년(고종 14) 12월 12일 상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제영 항목에는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1832]와 달리, 제영시만이 아니라 50면에 이르는 다수의 기문을 수록하였다. 「풍영루기(風詠樓記)」, 홍귀달의 「향교중수기(鄕校重修記)」, 이준의 「향사당중수기(鄕射堂重修記)」, 주세붕의 「향사당제명서(鄕射堂題名序)」, 채수의 「지락헌기(至樂軒記)」, 성헌징의 「수석정기(水石亭記)」 등이 있다.

「함창현읍지」 의 수록 항목은 함창현 여지도(咸昌縣 輿誌圖), 함창현읍지 총목(咸昌縣邑誌 總目), 강역(疆域), 건치 연혁, 군명, 성씨, 관직, 부곡, 봉름, 공해, 제영, 창고, 조적원총(糶糴原摠), 전부, 군액, 방리[부 호구], 풍속, 형승, 토산, 진공, 사묘(祠廟), 교원(校院), 산천, 불우, 제언, 교량, 우역(郵驛), 봉수, 장시, 능묘, 고적, 인물[부 과환], 명환[부 관적], 충효열 순으로 『경상도읍지』 「함창현읍지」[1832]와 항목 차이가 크다. 방리의 호구는 병자식 장적으로 호수(戶數) 2,775호, 인구 9,994명이어서 『경상도읍지』 「함창현읍지」[1832]의 2,746호, 9,873명과 다르다. 명환은 본조 신소(辛紹)부터 조종순(趙鍾純)까지인데, 조종순은 1876년에 부임하였으며, 암행어사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후임자인 조진억(曺鎭億)은 1878년에 부임하였다.

한편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는 1841년에 편찬한 『영남여지(嶺南輿誌)』 「상주목읍지」가 소장되어 있는데, 대체로 1832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 수록 내용과 같다. 존경각의 『영남여지』 제8책은 상주목·진주목 순으로 제본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경상도읍지』 「상주목읍지」·「함창현읍지」[1878]는 일본으로부터 반환받은 환수 문화유산으로 19세기 말 경상도 상주목함창현의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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