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02 |
---|---|
영어공식명칭 | Sabeolguk, The Ancient Kingdom of Sangju with The Breath of 2000 Year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정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번성하였던 초기 국가 사벌국의 정치와 문화.
[개설]
사벌국(沙伐國)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에서 번영을 누렸던 삼한 시대 초기 국가이다. 소백산맥의 풍부한 삼림 자원과 낙동강에서 비롯된 넓은 충적 평야를 배경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 사벌국이 등장하였다. 소백산맥을 넘나들 수 있는 주요 관문인 데다 낙동강·금강·남한강 수계(水系)까지 모두 연결된 수륙 교통의 결절점으로서 진한·변한 내 청동기 및 초기 철기 문화의 수용 창구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주 지역은 일찍부터 충청과 영남을 잇는 인적·물적 교류의 장으로 중요시되었으며, 사벌국은 외교·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진한 연맹체의 강국이 되었다.
사벌국은 상주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병성천이 동천과 만나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구간 일대의 충적 평야, 사벌 들판을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특히 병성천과 동천이 만나는 지점 일대의 구릉지에 국읍(國邑)을 형성하였다. 낙동강을 핵심 배경으로 번성한 사벌국은 병성천 수계를 따라 지금의 상주 시가지와 병성동, 낙동강을 따라 낙동면과 중동면까지를 포괄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수륙 교통의 제일 관문]
사벌국이 자리 잡은 상주 지역은 한반도 중남부를 관통하는 소백산맥이 북부와 서부 전체를 둘러싸고, 영남 최대의 젖줄 낙동강이 동쪽을 감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다만 소백산맥은 동북쪽 문경 방면에서 서남쪽 영동, 남쪽의 김천으로 이어지며 충청과 영남 지역 사이의 교류를 가로막는 자연 장벽과도 같았다. 청화산·속리산·형제봉·봉황산·천택산·팔음산·백학산·국수봉 등 험준한 산악이 불규칙한 형태로 자리 잡은 까닭에 화령·갈령 등의 고갯길과 산악 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야만 왕래가 가능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더라도 상주 지역은 고갯길과 계곡을 통로로 이용하여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부터 선진적인 청동기 및 철기 문화를 수용하였고, 이에 동반하여 정치·경제적인 역량 또한 급속하게 축적하였다.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동관음천(東觀音川)·금계천(錦溪川)·금상천(錦上川)·석천(石川)을 따라 금강 수계로 왕래하는 한편 서북쪽으로 흐르는 화양천(華陽川)을 따라 남한강 수계로 진출입함으로써 일찍부터 인적·물적 교류가 왕성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청동기 문화를 상징하는 비파형동검 그리고 송국리식 주거지가 상주를 거쳐 영남 내륙으로 확산하였을 것으로 보는 점은 이러한 교통로가 무엇보다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벌국은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증평군·청주시·보은군·옥천군·영동군 등지에서 성장하였던 정치체와 교류하며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고, 영남 지역 내 정치체들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국력을 강화하였을 것이다.
상주 지역의 서쪽 권역이 소백산맥을 왕래하는 주요 교통로로 사벌국의 선진 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면 서쪽 권역에서는 낙동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었다.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525.15㎞ 길이로 한반도 중남부에서 가장 길고, 수많은 지류를 포함하여 풍부한 수자원을 보유한 영남의 젖줄로 불린다. 총유역 면적이 2만 3860㎢에 이르러 대한민국 면적의 25%, 경상도로 한정하면 낙동강 유역은 전체의 75%에 해당할 만큼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상주 지역의 주요 하천은 대부분 서고동저의 지형을 따라 동쪽의 낙동강 방면으로 흐르는 만큼 이안천·병성천 등 여러 지류가 낙동강과 합류하는 동쪽 지역은 대체로 넓은 저지대의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지형적 조건에 있어서 낙동강은 사벌국 영역을 거치며 수량이 크게 늘어나고, 이에 따라 본격적인 농업 생산성이 높은 평야가 발달하였던 것이다. 사벌국은 이러한 자연 조건을 발판으로 농경문화를 꽃 피우고, 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근간으로서 많은 인구수를 부양하는 것이 가능하여졌다고 이해된다.
한편 사벌국의 영역을 관류하며 수량과 강폭이 크게 확대되는 낙동강은 자연스럽게 영남 서북쪽에 치우쳐 있는 사벌국 세력이 내륙 곳곳으로, 나아가 남해안까지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였다. 낙동강은 본류 및 지류를 따라 상류 방면으로는 문경·예천·안동·봉화 등을 거쳐 강원도까지 연결되는 북방 교통의 통로였다. 하류 방면 또한 본류를 따라 구미·칠곡·성주·대구·고령·합천·창녕·의령·함안·창원·밀양·김해·양산·부산 등을 흘러 남해안까지 진출할 수 있으며, 수많은 지류는 영남 내륙 전역으로 이어진다. 소백산맥 이북 지역과의 문물 교류에서 관문 기능을 담당하였던 사벌국은 낙동강이라는 수로를 시금석으로 정치·외교·경제·문화 모든 방면에서 진한 연맹체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사벌국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문경, 예천, 영주는 물론 인근의 의성, 안동, 김천 등지의 정치체와 협력·경쟁하며 사로국(斯盧國)의 세력 확장에 맞서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하였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마지막 균형추 사벌국]
사벌국은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충청과 영남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주요 관문으로 발전하였다. 서북쪽 한강 수계와 서남쪽 금강 수계를 따라 유입되는 외부의 문물은 물론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을 통하여 수용된 북방 계통의 문물 또한 낙동강의 핵심 관문인 사벌국을 거쳐 영남 전역으로 확산하였기 때문이다.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을 갖춘 사벌국은 선사 시대부터 문화적 선진 지역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는 정치·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졌다고 이해된다. 다만 삼한(三韓) 혹은 원삼국(原三國) 시대로 불리는 당시의 사회상은 소략한 중국 측 문헌 사료와 고고학 발굴 조사 성과를 참고로 재구성하여야 하는 만큼 면밀한 파악은 쉽지 않다.
선진적인 청동기·초기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사벌국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역설적으로 멸망 관련 기록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석우로전(昔于老傳)에는 “첨해왕[재위 247~261]이 왕위에 있을 때,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예부터 우리[신라]에게 속하여 있다가 갑자기 백제에 귀의하려 하였다. 우로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는 사실이 전한다. 이에 따르면 사벌국은 3세기 중반 진한 연맹체의 맹주 사벌국에 반기를 들어 백제에 접근하였다가 망국을 자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록은 진한 연맹체를 통합한 신라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만큼 사벌국의 상황은 제대로 설명하여 주지 않는다. 사벌국이 사로국에 반기를 들었던 까닭이나 백제와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 등은 밝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석우로전에는 231년 7월, 조분왕[재위 230~247]이 석우로를 보내 감문국(甘文國), 즉 지금의 김천시 지역을 정벌한 사실이 드러나 있다. 빠르게 국력을 신장하였던 사로국은 단순히 연맹체의 맹주로 만족하지 않고, 금호강-낙동강 수계를 이용하여 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정치·외교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벌국 지배층이 이러한 역학 관계 변화에 예민하게 반영하였고, 신라의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여 백제에 도움을 요청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헌 사료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3세기 중반에 사로국이 사벌국을 정벌하고, 상주 지역을 완전히 영역화하였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감안하면 김천 일대는 4세기 중반, 사벌국 중심지의 신라 지배는 4세기 후반 이후부터 본격화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시간상 차이는 있더라도 진한 소국을 통합하여 나간 사로국의 행보에 위협을 느낀 사벌국이 또 다른 강대국 백제와 결속 혹은 연대함으로써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렵 사벌국 또한 지금의 상주시 전역과 의성군 일부를 장악하며 최대 판세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한 제국 대부분을 통합한 신라와 단독으로 실력대결을 벌이기는 역부족이었던 만큼 사벌국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는 백제뿐이었을 것이다. 백제에게도 소백산맥을 손쉽게 왕래할 수 있는 주요 길목이면서 한반도 동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사벌국은 최고의 전진기지로 인식되었을 법하다. 문헌 사료에는 사벌국이 백제에 ‘귀의’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신라 측의 평가였을 뿐 실상은 생존을 모색하는 사벌국과 소백산맥을 넘어 세력을 확대하려는 백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 양국의 결속 혹은 연대가 극적으로 추진되었던 정황을 읽을 수 있다.
마한 연맹체를 통합하며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를 끌어들이면서 사벌국은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신라를 적극 견제하려 하였던 듯하다. 어쩌면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문물 교류를 주도하던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 장차 마한과 진한 지역 사이의 캐스팅 보트 내지는 균형추 역할을 추구하였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다만 사벌국과 백제의 연합 시도는 신라 지배층에게 큰 심리적 타격을 안겼고, 진한 통합을 더욱 서둘러야 하는 명분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한다. 3세기 중반 이후 4세기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왜(倭), 백제, 고구려 등 외부 세력과의 충돌이 부쩍 잦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는 이전부터 삼한 제국을 대표할 만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여 왔고, 국력 면에서도 우월한 수준에 도달하여 있었다. 이에 신라는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오기 전에 군사력을 발동하였고, 백제와 신라 사이를 조율하며 존재감을 키우려던 사벌국은 도리어 급작스러운 위기를 맞이하였다.
[서서히 밝혀지는 사벌국의 국읍, 이부곡 토성]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상주목 고적 조에는 “사벌국 고성(古城)은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왕릉이라 한다. 신라 말 견훤의 아비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병풍산 아래에 있다는 성은 크게 두 성곽으로 지목되는데, 병풍산성(屛風山城)과 이부곡 토성(吏部谷 土城)이다. 병풍산성은 병풍산의 동서 두 봉우리를 감싸 안고 축조한 포곡식 산성이며, 둘레는 1,864m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규모의 토석 혼축성이다. 산성 위에서 상주시 일대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데다 지정학적으로 병성천과 낙동강의 합수 지점을 내려다보고 있어 사벌국 최대의 요충지 가운데 한 곳으로 손꼽힌다. 일부 학자들은 병풍산성이 토석 혼축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며 사벌국 시대에 1차로 토성이 축조되었고, 신라에 편입된 이후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으리라 보기도 한다. 다만 최근까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병풍산성 내에서 사벌국과 관련될 만한 시기의 유물이나 유적은 확인된 바 없고, 산성은 대체로 통일 신라 시대의 유적으로 판단된다.
한편 이부곡 토성은 병풍산 북쪽 아래, 병성천 건너편의 성안산 동쪽 능선과 사면부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 대략 1,239m에 이르는 둘레의 토성은 마치 기울어진 ‘C’ 형태로 사벌 들판을 향하여 열려 있는 형상이다. 성 주변을 ‘∩’ 형태로 주변 구릉지가 감싸고 있으며, 소하천들이 사방으로 흘러 군사적 방어는 물론 주거 및 농경 활동에도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특히 이부곡 토성은 성 안팎에서 청동기 및 초기 철기 시대 유물이 일부 확인되었으며, 최근에는 동쪽 성벽의 일부를 단면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벽 아래 목책 열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목책은 토성을 쌓기 위한 기초 작업의 흔적으로 생각되지만 역사 발전 과정에서 성곽 이전에 등장하였던 방어 시설의 존재를 암시하기도 하므로 주목된다. 한편 성벽 축조는 대체로 구릉지의 사면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식에 충실하였다. 성벽의 기초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바닥 부분을 일부 ‘L’ 자 형태로 깎아 낸 후 흙을 쌓아 올렸으며, 성 안쪽에서는 성벽과 높이 차이가 크지 않아 손쉽게 이동할 수 있지만 바깥쪽은 흙을 쌓아 올리거나 깎는 등 최대한 경사도를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일부 급경사 부분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아직 이부곡 토성 일대는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주 지역 내에서도 정식 조사된 유적이 많지 않아 사벌국의 면모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실정이다. 하지만 이부곡 토성이 대략 4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졌고, 토성 이전에는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성 안팎으로 청동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만큼 사벌국의 국읍지는 이부곡 토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