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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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沙伐國 |
영어공식명칭 | Sabeolguk |
이칭/별칭 | 사량벌국(沙梁伐國),사불국(沙弗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방용철 |
폐지 시기/일시 | 247~261년 - 사벌국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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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524년 - 사벌국 군주 파견 및 상주 설치 |
비정 지역 | 사벌국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
성격 | 초기 국가 |
관련 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일대에 있던 초기 국가.
[명칭 유래]
사벌국(沙伐國)은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고도 한다. 사벌국의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 보이는데, 신라 석우로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또한 첨해왕 재위 기간에 사벌국을 취하여 주로 삼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사벌(沙伐)’은 이후 문헌에 따라 ‘사량벌(沙梁伐)’, ‘사불(沙弗)’ 혹은 ‘사화(沙火)’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공통적으로 벌판·들판이라는 지형을 중심에 둔 명칭으로 여겨진다. ‘사벌’ 가운데 ‘벌(불)’은 벌판·들판을 의미하며, 화(火)는 ‘불’의 훈차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사벌은 현재의 상주시 사벌국면 일대에 넓게 펼쳐진 낙동강 인근의 충적 평야를 일컫는 지역민들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편 신라의 영역 확장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의 진한 소국을 병합하였을 때 본래의 국명(國名)을 그대로 살려 둔 채 주(州)나 군(郡), 현(縣)을 붙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사벌국이 신라에 속하게 된 이후 사벌주(沙伐州)로 편제된 것도 같은 흐름에서 전통적인 국명을 계승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상주 지역은 남한강 수계, 금강 수계와 연결되는 한편 낙동강의 수량이 본격적으로 큰 규모를 이루는 지점에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외부 지역과의 교통은 물론 문물의 수용이 활발하게 일어나 선진적인 청동기 문화를 이룩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청동기 유적, 특히 권력자의 등장을 암시하는 고인돌 유적을 고려하면 상주 지역에는 이안천 일대의 함창읍, 병성천 상류의 모동면, 외서천 유역의 외서면, 병성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낙동면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세력 집단이 성장하였다고 짐작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벌국으로 통합되었으며, 지금의 사벌국면에 있는 이부곡 토성(吏部谷 土城)을 국읍(國邑)으로 하여 진한(辰韓)의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삼국사기』 석우로전(昔于老傳)에 사벌국의 멸망 과정을 밝히면서 “[첨해왕 때] 사량벌국은 예부터 우리에게 속하여 있었는데, 갑자기 배신하여 백제에게 귀의하므로 석우로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고 하였다. 첨해이사금[재위 247~261] 시대에 사벌국이 멸망하였다는 사실을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지만 사벌국이 충청권와 영남권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백제 세력과의 연합 혹은 연대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다. 사벌국이 신라에 완전히 병합된 것은 4세기 후반 무렵,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재위 356~402] 시대로 생각된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면 5세기 후반에는 상주 전역이 신라 문화의 지배력 아래 놓이며, 금강 수계를 따라 외부로의 진출 정황까지 확인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사벌국은 지금의 상주시 사벌국면 금흔리에 있는 이부곡 토성을 국읍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부곡 토성 일대를 중심지로 하여 병성천 수계에 해당하는 상주시 중심부와 병성동, 낙동강을 접하고 있는 낙동면과 중동면 일대까지 영역을 구축하였다. 백제와의 교섭 기사를 감안하면 금강 수계를 따라 현재의 상주시 서남부와 추풍령을 따라 상주시 서부 권역 또한 관할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고령가야(古寧加耶)의 존재가 기록된 『삼국유사(三國遺事)』 5가야(五加耶) 조와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古寧郡) 조 기사를 고려하면 상주 북부 권역과 관련하여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석우로전에서 “사량벌국은 예부터 우리[신라]에게 속하여 있었는데, 갑자기 배신하여 백제에 귀의하려 하니 석우로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상주(尙州) 조에서 “상주는 첨해왕 때 사벌국을 취하여 주(州)로 삼았다. 법흥왕(法興王) 11년(524), 양(梁)나라 보통(普通) 6년에 처음 군주(軍主)를 두고 상주(上州)로 삼았다. 진흥왕(眞興王) 18년에 주(州)를 폐지하였다. 신문왕(神文王) 7년(687), 당(唐)나라 수공(垂拱) 3년에 다시 주를 설치하여 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1,109보였다.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이름을 상주(尙州)로 고쳐 지금[고려]에 이르렀다. 영현(領縣)은 셋이다. 청효현(靑驍縣)은 본래 음리화현(音里火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청리현(靑理縣)이다. 다인현(多仁縣)은 본래 달이현(達巳縣)[혹은 다이(多已)]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화창현(化昌縣)은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잘 알 수 없다”라는 연혁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