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013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순한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있는 풍산 류씨 류진의 종가.

[개설]

‘수암 류진 종가(修巖 柳𥘼 宗家)’는 풍산 류씨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서애파에서 분파된 우천파의 종가로 류진(柳𥘼)[1582~1635]을 파조로 한다. 종가의 이름은 류진의 호 수암(修巖)을 따서 지었다. 류진상주 우천에 이거한 이후 ‘상주 수암 류진 종가’ 또는 ‘수암공파’로 불리며 서애학통을 상주 지역에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류성룡은 “노력하여 너희들은 모름지기 삼가거라. 충효 이외의 사업은 없다. 또 힘껏 선한 일을 생각하고, 힘껏 선한 일을 행하여라.[경계·충효·선행]”라는 유훈을 남기면서 아들 류진에게 ‘학행’과 ‘구방심(求放心)[풀어진 마음을 거두다]’ 다음으로 엄격히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류진은 1618년 상주 우천에 종가의 터전을 마련한 후 일생 동안 아버지가 남긴 유훈을 종가의 종법으로 삼아 엄격하게 실천하였다. 후손들은 종가의 후예답게 대대로 류진이 세운 종법을 계승하였고 이후 수암 우천 종가는 우천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명문가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상주 우천에 입향한 수암 류진 종가]

류진이 상주에 입향한 곳은 중동면 우천 가사리(佳士里)이다. 가사리에는 수원 백씨(水原 白氏)가 가장 먼저 입향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남원 양씨(南原 梁氏)가 이거하였고, 이후 풍산 류씨가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618년 류진이 상주 가사리로 이주할 당시 가시덩굴이 우거져 있어 ‘가시리’ 또는 ‘시리(柴里)’로 불렸다. 이후 농토를 일구어 뽕나무를 많이 심은 마을로 알려지면서 ‘시상촌(柴桑村)’으로 불리다가 류진이 입향한 후 많은 선비가 배출되고 학자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가사리(佳士里)’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류진의 큰아들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1616~1689]의 사위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류천지의 행장을 쓰면서 류진의 이거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문충공이 또 아들 삼 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아들의 휘는 이요 자는 계화이며, 호를 수암이라 하였다. 세거지인 하회에서 상산[尙州]의 시리로 길지를 가려서 이거하였다.” 류진우천으로 이주한 후에는 창석 이준이 다음과 같은 「제가사리(題佳士里)」라는 시를 지어 류진을 환영하였다.

호걸이 사는 몇 칸 오두막집[數間茅屋著人豪]

담장과 집 낮지만 도의는 드높네[牆屋雖卑道義高]

문밖에 거마가 드물다 저어하지 마소[門外莫嫌車馬少]

청산과 강물이 마음과 어울린다네[靑山流水是心交]

여러 기록을 참고하면 류진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우천으로 정하게 된 데는 스승 우복 정경세의 영향이 컸다. 정경세는 서애학통을 이은 고제이고, 정경세를 스승으로 모시고 서애 학문을 연마하는 문인들이 우천 인근에 포진하여 있었기 때문에 학문 교류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천류진이 본래 살던 곳인 안동 하회마을 못지않은 경관과 ‘길지’ 혹은 ‘배산임수 장소’, ‘이수삼산(二水三山)의 지점’이라는 평가에 대하여서도 중대한 의미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류진우천으로 이주한 후 위수(渭水)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 8곳을 선정하여 「위빈팔경(渭濱八景)[위수 가의 팔경]」이라는 시를 지은 데서 잘 드러난다. 팔경은 ‘쌍매당(雙梅堂)’·‘백률원(百栗園)’·‘타맥대(打麥臺)’·‘영운잔(縈雲棧)’·‘지천석(支天石)’·‘장천암(障川巖)’·‘수륜기(垂綸磯)’·‘관란대(觀瀾臺)’이다. 류진은 스스로 ‘위빈어은(渭濱漁隱)’이라는 호를 지을 만큼 우천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류진의 현손 류성로(柳聖魯)[1709~17852]는 가사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우물리에 현재의 종택 자리에 새롭게 초가를 지었다. 이후 19세기 건물을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류성로의 손자 류심춘은 새로 지은 집의 내력을 두고 “시리촌에 살다가 이사한 곳이 초가를 지은 곳인데, 강고(江皐)와 멀지 않은 곳이다. 배산임수의 장소이며, 우리 선인이 여기에서 생을 마치셨다”라고 하였다. 또 류심춘의 큰아들 낙파 류후조(柳厚祚)[1798~1876]는 증조할아버지 류성로의 가장(家狀)을 정리하면서 옛집에서 우천 우물리로 이사한 내용을 언급하고 새로 지은 집터를 풍수지리에 맞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일찍이 어은[류천지] 부군[류진]께서 즐기시던 위빈팔경(渭濱八景) 속에 있는 옛집에서 약간 떨어져 위수와 낙강이 서로 합쳐지는 곳에 새로 수간초옥을 지어 옮겨 살았으니, 즉 이수삼산(二水三山)의 영기가 모아진 승지였다.” 실제 류성로도 우천의 위치가 좋은 자리라고 여겼던 것 같다. 류진의 입향 관련 자료와 우천에 대한 여러 문인의 평가, 풍수지리로 해석한 내용을 확인하여 보면 류성로도 우천이 길지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본인이 거주하면서 몸소 체득한 면들도 있었을 것이다. 수암 종가 대청에 걸려 있는 이강정사(二江精舍) 현판에서도 종가가 풍수지리에 부합한 명당이라는 자부심이 잘 드러나 있다.

[상주 우천에서 꽃피운 수암 류진 종가]

조선 시대 가문이 성장하여 새로운 파조(派祖)로 분파되어 종가로 인정받기 위하여서는 ‘명(明)·현조(顯祖)’ 배출 여부가 상당히 중요하였다. 명·현조는 사표(師表)가 될 만한 학자이거나 혹은 국가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 과거나 천거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 등을 말한다. 풍산 류씨는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이라는 현조를 배출하였다. 또 두 인물의 후손 중 사림 사회에서 추앙받는 훌륭한 학자가 배출되는데, 류진이다. 류진상주 우천에 정착하였을 당시는 아버지 류성룡과 두 형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가문의 대소사를 모두 책임져야 하였다. 또한 상주 지역 내에서는 서애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 문인들과 교류하며 대내외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문에서 사마시 합격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향촌 사회에 가문의 위상, 지역 사족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력과 직결된다. 수암 류진 종가에서도 류진을 비롯한 후손들은 과거 혹은 유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며 종가의 명성을 높여 나갔다. 수암 종가 후손 중에서 관료로 진출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사마시 입격자는 7명이고, 문과 급제자는 2명, 학행 또는 음사(蔭仕)로 진출한 인사는 9명이었다. 음사의 경우 학문이 뛰어나 유일, 학행, 문음, 일음(逸蔭) 등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 현감, 군수 등으로 출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과거로 출사하는 것보다 유일이나 학행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학자로서는 더 명예로운 것이었다. 과거로 학문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학식과 덕망이 검증되어 학자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류진은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유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정경세에 의하여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에 임명되었다. 류진정경세에게 남인의 대표 인물로 추천될 정도의 학덕과 위상을 확보하였다. 류진의 큰아들 류천지도 일음 또는 일천(逸薦)으로 천거되어 참봉으로 부임한 이래 사헌부 장령까지 지냈다. 류진의 6대손 류심춘은 1795년 일음으로 천거되어 용양위 부사용직을 시작으로 순조·익종·헌종 3대의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고, 손자 류주목도 학행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 도사를 역임하였다. 이처럼 류진우천에 세거지를 형성한 이후 상주의 풍산 류씨 문중은 뛰어난 학자와 관료를 배출하였고, 이로써 수암 종가는 서애학통을 계승한 종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영남 지역에서는 문중 형성만큼 중요한 것이 혼사였다. 향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한 사족이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혼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상주의 향촌 사회에서도 이황의 학문적 영향은 압도적이었고, 퇴계 학문을 계승한 문인들은 향촌 사회에 성리학적 실천 윤리를 정착시켜 향촌의 질서를 주도하였다. 또 향촌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문인 간 혼사를 통하여 퇴계학맥의 외연을 확대하였다. 16~17세기 수암 종가의 혼사에서도 이러한 점이 반영되어 퇴계 문인과 상주 지역의 정경세이준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맺어졌다. 혼인의 범위는 안동·예안·문경·상주·영천 등으로 풍산 류씨 거주지와 가까웠다. 이 중에서도 안동에 거주하는 성씨와의 혼인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18세기에는 수암 종가와 혼인한 성씨가 25개에서 38개로 늘어났는데 종가의 성장과 인구 증가를 의미한다. 또 이 시기는 퇴계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분류되어 갑술환국 이후 중앙정계 진출이 좌절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향촌 문제에 한층 관심을 두었고, 조상 현창 사업, 제사 실행, 문집과 족보 간행 등을 문중 생존 차원에서 수행하여 갔다. 수암 종가는 18세기 상산 김씨·철성 이씨·진주 강씨·동래 정씨·여산 송씨·월성 손씨 등 상주 지역을 주도하는 여러 가문과 혼맥을 형성하였고, 19세기에는 상주 지역의 진양 정씨·풍양 조씨·진주 강씨· 흥양 이씨 문중과도 혼인하는 한편 안동의 진성 이씨·안동 권씨·의성 김씨와 혼반을 유지하며 결속을 강화하면서 향촌을 주도하였다.

[서애 학통을 계승한 수암 류진 종가의 인재]

영남에 퇴계학을 보급·계승시킨 수제자는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1593], 류성룡,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이다. 세 명의 수제자는 학문 활동에 힘써 여러 제자를 배출하였고, 제자들은 각자 처한 환경에 적응하며 퇴계학의 폭과 깊이를 넓혀 갔다. 류성룡의 경우 가학으로는 아들 류진에게 전하였고, 상주목사 재직 시절에는 사제 관계였던 정경세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류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정경세를 스승으로 섬기며 학문을 이어 갔다. 류진이 상주로 이거한 후에는 정경세, 상주 문사들과 학술 교류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서애학통이 더 구체화되었다. 이후 류진은 상주 학계에서 인정한 서애학통의 계승자로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된다. 문헌 자료에 퇴계학을 계승하여 서애학통을 이은 수암 종가 인재는 6명으로 확인된다.

첫 번째 인재는 류진이다. 류진은 아들 류천지, 정경세의 아들이자 사위인 정종로(鄭宗魯)[1738~1816]에게 서애학통을 잇게 하였고, 정종로류진의 6대손 류심춘에게 학문을 전하여 주었다. 한편 류진은 장조카 류원지(柳元之)[1598~1678]를 통하여 안동 하회에서도 서애학통을 이어 가게 하였다. 류진에게 학문을 이어받은 류원지는 다시 류백지·류의하·류세철·류세명에게 전수하였고, 류세명은 류후장, 류성화, 류규, 류이좌에게 계승하였다. 이처럼 서애학통은 서애 찰방공파와 우천파 수암 종가를 중심으로 충실히 계승되었다.

두 번째 인재는 류천지이다. 아버지 류진에게 서애학통을 이은 류천지는 사서가 학문의 근본이라는 것과 숙독정사(熟讀靜思)[주자 독서법 중 하나로, 뜻을 생각하며 정밀하게 읽고 고요히 생각하는 방법]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류진은 자신의 학습관인 청심(淸心)[마음을 맑게 하다], 정려(靜慮)[고요히 생각하다], 정처근독(靜處勤讀)[조용한 곳에서 부지런히 독서하다]을 강조하였다. 또 종가의 종법인 구방심은 “종일 앉아 있는 것은 쉬워도 마음을 잡는 일은 일각도 어렵다”라며 정신을 집중하여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류천지는 정사와 숙독을 익혔으며, 마음을 집중하여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 학문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경서(經書)와 예서(禮書)에 해박하였다.

세 번째 인재는 류진의 6대손인 류심춘이다. 류심춘은 서애학통을 계승하여 숙독정사와 류진이 강조한 청심·정려·정처근독의 학습관을 성실히 실천하였다. 이 중 『맹자』의 ‘구방심’을 종가의 교육관으로 삼은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나아가 구방심을 하기 위하여 ‘경(敬)’과 ‘의(義)’를 실천할 것을 제시하였다. 류심춘은 27세 때 정종로의 문하생이 되었다. 상주 지역의 퇴계학은 류성룡-정경세·류진-류천지·정도응·홍여하-정종로-류심춘으로 전승되었다. 즉, 상주의 퇴계학이 수암 종가와 우복 종가 주도로 계승되는 과정에서 류성룡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서애학단이 결집된 것이다. 정종로는 학문에만 매진하는 류심춘을 ‘독학군자(篤學君子)’라 부를 정도였다. 류심춘의 학문은 자신이 전수한 서애학통과 수암 종가의 가학을 통하여 아들 류후조(柳厚祚)[1798~1876]와 손자 류주목(柳疇睦)[1813~1872]으로 전승되었다.

네 번째 인재 류후조류성룡 이후 300년 만에 영남 남인으로 정승까지 오른 특별한 인물이다. 류후조는 인성 교육에 중요한 유년기를 아버지 보호 아래 지내면서 종가의 종법과 서애학통의 기초 교육을 받았다. 또 류후조가 아들 류주목(柳疇睦)을 낳고 난 이후에도 류심춘은 손자에게 독서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며 책방에 비가 새는지 걱정하는 등 손자가 착실하게 공부하도록 독려하는 편지를 자주 보내었다. 1834년 류후조의 나이 37세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틈만 나면 곁에서 서애학통을 전수하며 학문을 익혔다. 류후조는 평소 “신은 원래 벼슬에 뜻이 있어서 산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6대조 류진이 “세신(世臣)이어서 야인을 자처하며 거드름[偃蹇]을 피울 수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충효를 실천하는 데 세신의 자세를 엄격히 적용할 것을 종가의 가법으로 삼은 데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류후조는 헌종, 철종, 고종 3대에 걸쳐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섯 번째 인재인 류주목수암 종가 류진의 주손(胄孫)이며 류후조의 큰아들이다. 류주목은 어릴 때부터 조부 류심춘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류심춘은 손자에게 서애학통의 퇴계학문과 종가의 종법인 ‘신독·충효·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글을 써 주며 학문에 게으르지 않도록 다독였다. 류주목은 어려서부터 22세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서애학통을 계승하였다. 류주목은 학통 계승의 핵심은 독서이고 독서는 반드시 숙독(熟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숙독의 방법으로는 ‘구방심’이 제일 중요하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류주목은 우천 가사리 동쪽에 작은 서재를 지어 ‘계당(溪堂)’이라 편액하고 학문 정진과 수기(修己)에 힘썼다. 이후 인근 지역에 류주목의 학문과 식견이 알려지면서 문하생이 되고자 찾아오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났다. 류주목은 제자들과 함께 강학과 학술 토론을 이어 갔다.

류주목은 할아버지 류심춘의 행장을 정리하면서 서애학통의 전승관계를 이황-류성룡-정경세·류진-류천지·정도응-정종로-류심춘-류후조·류주목으로 재정리하여 확정하였다. 류주목은 가학을 통하여 우천파 수암 종가의 류흠목(柳欽睦)[1843~1910], 서애 찰방공파의 류도성(柳道性), 류도헌(柳道獻), 류응목(柳膺睦)[1841~1921] 그리고 생물파의 류도발(柳道發), 겸암 교관공파의 류도수(柳道洙)로 하여금 학문을 잇게 하였다.

마지막 인물인 류흠목(柳欽睦)[1843~1910]은 류진의 손자 류위하(柳緯河)[1666~1736]의 6대손으로, 자는 치결(穉潔)이고, 호는 극암(克菴)이다. 류흠목은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숙부(從叔父) 류후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류후조는 자신의 장자이자 수암 종가의 서애학통을 전수한 류주목으로 하여금 공손하고 총명한 류흠목을 다독여 종가의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류흠목은 육촌형을 스승으로 모시고 『중용』과 『대학』 등의 경서를 배웠고, 예학에 대한 소양을 넓혀 갔다. 류주목은 학문을 독려하거나 훈계하지 않아도 학문에 심취하여 학업이 나날이 성취되어 가는 류흠목을 두고 “문질(文質)이 겸비되었으니, 반드시 우리 종가를 크게 빛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류흠목은 예경(禮經)뿐만 아니라 과학·지리·역산(曆算)에까지 통달하였다. 책 내용의 여러 행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고 책을 덮고도 모두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 류흠목은 가까운 문인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어려운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종종 제자들과 도학을 강론하거나 시를 지었다. 이처럼 17세기에 종가를 세운 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애학통과 수암 종가 종법의 근본은 흔들림 없이 전승되었다.

[수암 종가의 건축 문화]

상주 수암종택은 본채, 녹사청(祿使廳), 사당, 대문채, 방앗간채, 화장실 2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6칸의 ‘ㅁ’ 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녹사청은 측면 4칸의 ‘ㄴ’ 자형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 자형으로 건립하였다. 본채로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게 되는데 정면 2칸 규모의 안대청이 있으며, 전면으로 4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고, 안방에서 사랑방까지 안채를 마루로 연결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동선이 이어지도록 하였다.

안채는 안방, 부엌, 고방, 마루방, 상방, 마루로 이어져 있다. 안채 영역은 오른쪽에 있는 대청을 기준으로 좌익사 7칸, 우익사 3칸 규모로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안채 대청마루 뒤에는 거북 형상을 닮은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집을 지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 영역은 본채 전면에 있으며, 사랑부엌, 사랑방, 사랑 대청, 방 및 서가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 툇마루 위에 안종원(安種元)[1874~1951]이 쓴 ‘우천세가(愚川世家)’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전면에 있는 녹사청은 류후조 때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을 지고 오는 지방 관리를 영접하고, 쉬거나 묵게 하던 건물로 일반 사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건물이다. 중앙의 부엌 1칸을 기준으로 북쪽은 방 1칸, 마루방 2칸, 남쪽은 방 2칸, 마루방 1칸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여 모든 방을 연결하였다.

사당은 상주 수암종택 오른쪽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류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내부는 통칸이고,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를 두었다. 사당의 중문은 신이 드나드는 곳으로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을 통하여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속 건축물로는 방앗간채와 대문채가 있다. 방앗간채는 본채 왼쪽에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초가이다. 대문채는 1996년 건립한 것이다.

[상주 수암 류진 종가의 의미]

수암 종가는 17세기 전반 수암 류진이 상주에 이거하여 정착한 이래 서애학통을 확립하면서 종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류진으로 이어진 서애학통을 계승하였고, 류성룡이 남긴 유훈을 종가의 종법으로 삼아 영남 지역에 서애 학문을 확산시켰다. 수암 종택 건축물은 대문채의 신축으로 인한 진입로 변경과 화장실, 창고로 추정되는 기타 건물 등의 변화를 제외한 모든 건축물의 원형을 잘 유지한 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제례불천위 제례, 기제사, 묘제, 차사가 전승되고 있다. 상주 수암종택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9.30 인명 수정 류진(柳袗) → 류진(柳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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