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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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Head Family of Sangju and Bulchunwee Rituals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현조를 중심으로 뿌리내리고 적장자로 계승되어 온 집안인 종가와 현조를 모시는 제례 이야기.
[개설]
상주시는 유교 문화가 꽃핀 경상북도에서도 종가의 문화가 두드러지게 남아 있는 지역이다.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상주의 종가는 16곳으로, 이들 종가는 유교 문화와 선비 정신, 종손과 종부의 삶이 녹아 있다.
[종가와 불천위 제례]
종가는 종법 제도에 따라 적장자 중심으로 부계 혈통이 계승되는 집안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종법에 없는 파종(派宗)의 개념에 기초한 파종가(派宗家)가 실제로 가장 일반적인 종가이다. 파종가는 조선 시대에 국가적·사회적으로 큰 공적을 쌓았거나 덕망이 높아서 불천위로 추대된 현조(顯祖)[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로부터 성립된 종가이다. 그러므로 적장자로 이어지는 집 가운데서도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집만이 자타가 인정하는 종가로 인식된다.
4대 봉사 이후에는 신주를 묻는 것이 원칙이나 학문적인 업적이 뛰어나거나 국가에 현저한 공을 세운 인물의 경우 신주를 사당에 영구히 모실 수 있는데, 이를 불천위라고 한다. 불천위는 인물의 업적이나 지위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조상 숭배를 넘어서 지역이나 국가에서 기념되거나 추도된다는 성격을 지닌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문중의 입장에서 보면 조정이나 유림에서 봉사할 만한 위대한 선조를 가졌다는 영예가 주어지기 때문에 문중 성원들의 단결과 동질감을 강화시켜 준다. 불천위 제사에는 기제사와 달리 익히지 않은 희생 제물을 올리기 때문에 불천위는 ‘혈식군자(血食君子)’라고도 불린다.
[소재 노수신 종가와 불천위 제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1515년(중종 10) 서울 낙선방에서 태어났다. 노수신의 집안은 7대조인 노상인(盧尙仁) 대부터 상주에 정착하였지만 후대에는 중앙에서 관직 생활을 하여 주요 근거지는 서울이었다. 노수신은 일찍이 글을 쓰고 시를 짓는 등 재능을 드러내 7세 때부터는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에게 사사하였고, 1531년에는 스승의 딸과 혼인하였다. 1541년에는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1491~1553]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으며, 1543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자시강원사서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노수신의 젊은 시절 관직 생활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진도로 20년간 유배를 가게 되었다. 노수신은 진도군수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진도 지역의 거칠었던 풍속을 성리학의 예와 법도로 교화시키고 여러 편의 저서를 남겼다.
노수신은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홍문관교리에 기용되었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589년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된 뒤 1590년에 사망하였다. 1693년(숙종 20)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노수신은 상주의 도남서원과 봉산서원, 충주의 팔봉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2. 소재 종가의 위기와 재건
소재 노수신의 후손인 광주 노씨(光州 盧氏)[광산 노씨(光山 盧氏)] 경평공파는 소재 노수신 종가가 있는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소재 노수신 종가는 조선 시대에 영의정에 오르고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선조를 가졌지만 계승이 단절되는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입향조 대부터 있던 종택 건물은 177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고, 당시의 화재로 종손마저 사망하여 소재 노수신 종가는 단절의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안타까워한 후손들은 지차(之次)[맏이 이외의 자식들] 집안의 남자 후손인 노여경(盧與儆)을 종손으로 세워서 종가를 복원하였다. 또한 당시의 화재에서 불타지 않고 겨우 남은 불천위사당을 옥연사(玉淵祠)의 동쪽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다가 보종계에서 기금을 모금하여 1990년 1억 원을 들여 현 위치에 종가를 새롭게 지었다. 소재 노수신 종가는 대대로 자손이 귀하고 문중 행사에 참여하는 젊은 성원이 없어서 현재도 힘든 상황이지만 촌수가 먼 족친들의 도움과 참여로 오랜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
3. 불천위 제사 준비
노수신의 불천위 제사 제일은 음력 4월 7일이다. 제사 당일 오전부터 종부와 안주인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옥연사 강당에서는 시도기를 작성하고 각지에서 모인 문중 성원들이 담소를 나누며 집사를 분정한다. 종손이 초헌관을 맡고 문중의 연장자들이 아헌관·종헌관 및 축관·알자·찬인 등 제집사의 역할을 배정받는다. 분정을 마치면 종손을 비롯한 집례자들은 사당에 모셔 놓은 신주를 제청으로 모신다. 신주를 모시기 전에 출주 고사를 지내고 주독을 제상에 올린다. 편·메·갱·포·과일 등을 진설하면 제사 준비가 끝난다.
4. 제의 과정
제청이 마련되면 신주의 주독을 개봉하고 집사자는 홀기에 적힌 절차에 따라 집례를 시작하는데, 집례는 제일 먼저 손을 씻고 절을 두 번 한다. 그 다음 초헌관을 비롯한 헌관과 다른 집사자들이 차례로 손을 씻고 모두 절을 두 번씩 해 참신례를 행한다. 조상과 후손들이 해우를 한 뒤에는 신을 자리에 모시는 강신례를 행한다. 초헌관은 향을 피우고 고위의 잔을 내려 모사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붓는다. 이로써 조상이 내려오기를 청하고 제사의 시작을 알린다. 초헌관은 두 번 절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강신례를 마치면 조상에게 술을 올리는 헌작례를 한다. 초헌관부터 차례로 고위와 비위에 잔을 올린 뒤 절을 한다. 초헌례를 할 때는 메[제사 때 신위(神位) 앞에 놓는 밥]의 뚜껑을 열고 모든 음식을 개봉한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면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아헌도 마찬가지로 잔을 올리고 재배하는데, 치적[꿩 구이]을 올린다. 종헌은 어적을 올린다. 헌작례가 끝나면 조상이 음식을 드시도록 권하는 유식례를 행한다. 초헌관이 삽시정저를 하고 모든 헌관이 재배한 다음 나머지 모든 참례자들이 부복한다. 축관이 헛기침 소리를 내면 다시 일어난다. 다음으로는 진다례와 사신례를 행하고 제사를 마친다. 제사를 마친 뒤에는 축문을 태우고 음복상을 준비한다. 음복상에는 제상에 올랐던 음식과 나물로 만든 비빔밥이 오른다. 참례자와 문중 성원들은 음복을 하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회포를 풀고 문중의 여러 가지 일을 논의한다.
[우복 정경세 종가와 불천위 제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1563년(명종 18) 지금의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났다. 1580년(선조 13) 상주목사로 부임한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8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6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하다가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 뒤 투옥되었다. 이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상주 지역에서 왜군과 싸웠고, 1589년에는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전란을 수습하고 민심 교화에 힘썼다. 이 시기 당쟁이 격화되자 관직에서 물러나 상주로 낙향하였고, 낙사합계(洛社合禊)를 중심으로 이전(李㙉)·이준(李埈)·김각(金覺)·성람(成灠) 등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설립하고 향민의 질병 치료와 민심 교화에 힘썼다. 1605년에는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건립을 주도하여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5현을 합사하여 영남 도학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과 인조 대를 거치며 다시 중앙 관직으로 나아간 정경세는 승정원도승지·세자시강원좌부빈객·사헌부대사헌을 두루 거치고 1629년에는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재학이 되었다. 1632년 70세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여 사벌국면 매호리에 우거하다가 1635년 6월 17일 사망하였다. 정경세는 사망한 뒤 상주의 도남서원,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강릉의 퇴곡서원(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體參考)』, 『주문작해(朱文酌解)』 등이 전한다.
2. 제사 준비
정경세의 불천위 제사는 음력 6월 17일,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종택에서 이루어진다. 기일 하루 전날인 입제일에 종손은 목욕재계하고 상주 시장에서 제사 장보기를 하여 제반 준비를 한다. 안채에서는 제물을 마련하고 종손은 사당과 집안의 안팎을 청소한 뒤 오후부터는 각지에서 온 종친과 손님을 응대한다.
3. 집사 분정
불천위 제사 참례자들은 종택에 도착하면 이름과 거주지 등을 기록한다. 불천위 대제이므로 기제사와 달리 다른 문중의 내빈도 집사로 참여한다. 초헌은 종손, 아헌은 종부가 맡는다. 종헌은 상주향교 전교 등 지역의 유림 인사가 맡는다. 이 외에 진설, 집례, 축관 등 제집사를 선정한다.
4. 진설
제상은 종택의 대청 북벽에 병풍을 치고 설치한다. 제상 뒤쪽 중앙에 신주를 모실 교의를 놓고 앞에는 향안을 둔다. 향안 위에 향로와 향합을 올리고 진설을 맡은 사람들이 제물을 진설한다.
신위를 기준으로 가장 바깥에 있는 1열에는 과일을 놓는다. 조율이시[대추, 밤, 배, 곶감]를 순서대로 놓고 그 사이에 참외, 자두, 토마토 등의 시과와 약과, 정과를 진설한다. 바로 뒤인 2열에는 자반과 물김치를 양쪽 끝에 놓고 그 사이에 미나리, 가지, 고사리, 도라지 등 각종 나물을 올린다. 3열에는 탕을 놓는데 우복 정경세 종가에서는 제사의 성격에 따라 탕의 종류를 다르게 한다. 기제사에 세 가지 탕을 쓴다면 불천위 제사에는 일곱 가지의 탕을 올린다. 4열에는 면과 편[떡]을 제상의 좌우 끝에 올리는데, 제상이 좁아 편은 작은 상에 따로 놓아서 올린다. 5열에는 메와 갱[제사에 쓰는 국]을 놓는데, 비위(妣位)가 둘이라 세 쌍의 메와 갱이 올라간다. 가장 왼쪽에는 시접을 놓는다.
5. 제의 과정
저녁 8시가 되면 종손이 사당에 가서 출주 고사를 지내고 신위를 제상으로 모신다. 정경세의 불천위를 제상의 교의에 두고 개독하면 참례자 일동이 두 번 절하여 참신례를 행한다. 이후 종손이 초헌례를 한 뒤 어적을 올린다. 초헌을 마치면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독축이 끝나면 초헌은 재배를 하고 종부가 아헌을 한다. 아헌 때는 독축을 하지 않고 육적을 올리며 4배를 한다. 종헌은 신위께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순서로 절차는 아헌 때와 같다. 집사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아 퇴주기에 세 번 제작하고 헌작한다. 다음 순서인 첨작 때에 술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헌작 후 계적을 올리고 종헌 후에는 철주하지 않는다. 헌작을 마치면 유식례와 합문을 한다. 합문은 병풍을 제상에 둘러치고 모든 제관이 부복한다. 축관이 기침을 세 번 하면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헌다를 하고 사신 재배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주인은 술잔을 철주하고 축문을 태운 뒤 음복을 한다.
[검간 조정 종가와 불천위 제례]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555년(명종 10) 8월 22일에 태어나 정구(鄭逑)와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정경세·권경호(權景虎)·이홍도(李弘道)·채유희(蔡有禧) 등과 함께 함창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1599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이 되었고, 1603년 군기시주부가 되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05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사헌부감찰·북평사·예조좌랑·대구판관·경주제독·해남현감·공홍도도사·청도군수를 역임하고 사직한 뒤 낙향하였다. 1623년(인조 1) 김제군수로 관직에 복귀하였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형조정랑·통례원상례·사섬시정·봉상시정을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고, 1636년 사망하였다. 조정은 사망한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상주 장천서원(長川書院)과 의성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검간문집(黔澗文集)』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전한다.
2. 제사 준비
조정의 불천위 제사는 풍양 조씨(豊壤 趙氏) 장천파 문중 위토의 수익금과 중앙 종중 지원금을 비용으로 사용한다. 과거에는 고지기가 준비를 맡았으나 현재는 문중 종회장 부부가 전담하고 있다. 제물 준비는 문중의 네 개 파에서 각각 유사를 선정하여 이들이 장을 본다. 제수 음식은 양진당(養眞堂) 뒷마당에서 만든다. 불천위 제사를 위한 제수 음식은 많은 정성을 요한다. 특히 떡을 쌓아 올리는 편을 만들기 위하여 조악, 전, 까꾸리, 잡과편, 부편, 쑤구리, 송기송편, 경단, 백편, 찰편, 본편 등 열한 가지의 떡을 정성들여 준비한다. 이 외에도 일곱 종류의 육고기와 생선구이, 대구포와 문어포, 생문어, 방어, 한과, 국수, 쌈, 다섯 종류의 탕, 과일 등을 준비한다.
3. 집사 선정
조정 불천위 제사는 음력 7월 21일 새벽 6시에 지낸다. 20여 년 전에는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지냈지만, 종손을 비롯한 문중 성원들이 제사를 위하여 서울이나 대구 등 타지에서 오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조정하였다고 한다. 전날 늦은 시간부터 문중원과 참제자들이 도착하면 집사 분정을 한다. 종손이 초헌관을 맡는다. 풍양 조씨 장천파는 초은공파, 유담공파, 동추공파, 병록공파의 4개 파가 있는데 각 파에서 안배하여 아헌, 종한, 축관, 집례 등을 맡는다.
4. 제의 과정
집사 분정을 마치면 준비한 음식을 진설한다. 보통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비가 오면 양진당 종택에서 제사를 올린다. 이때는 종손이 출주 고사를 지내고 사당에서 신위를 제청으로 모신다. 진설이 완료되면 참신례를 한다. 모든 제관이 재배를 한다. 참신례를 마치면 초헌관이 향을 피우고 재배 후 잔을 올리는 강신례를 한다.
다음으로 초헌례를 행한다. 초헌관은 손을 씻고 재배 후 첫잔을 올리고 문어를 올린다. 초헌 후에는 축관이 축문을 읽고 초헌관이 재배한다. 다음으로 아헌례와 종헌례가 이어진다. 아헌관과 종헌관은 장천파 4개 문중의 연장자가 맡는다. 각각 잔을 올리고는 닭, 쇠고기를 올리고 재배한다. 종헌례를 마치면 종손이 첨작을 한다. 첨작을 마치면 사당 문을 닫고 합문을 한다. 종택의 제청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병풍을 친다. 모든 제관은 축관이 세 번 기침할 때까지 사당 밖이나 병풍 앞에서 부복한다. 합문을 마치면 국을 치우고 숭늉을 올리는 철갱과 헌다. 재배를 하는 것으로 제사를 마친다. 제사를 마치면 신위를 닫고 축문을 태운 뒤 상을 치우고 음복을 준비한다. 음복을 준비하는 사이 오래간만에 모인 문중 성원들은 문중의 대소사를 논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