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생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266
한자 住生活
영어공식명칭 Housing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기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지역 상주 양진당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승곡리 214-3]지도보기
관련 지역 상주 우복 종택 -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 지도보기
관련 지역 상주 의암고택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운평2길 42-7[운평리 141-1]지도보기
관련 지역 상주 취은고택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골가실1길 138-7[봉산리 560]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주거 공간 및 주거와 관련된 생활 관습.

[개설]

집은 인간 생활의 기본이 되는 시설로서 인간을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며 가정과 사회생활의 바탕이 된다. 주거의 양식과 주생활은 자연환경이나 사회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특색을 띤다. 경상북도 상주 지역은 넓은 들과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오래전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또한 근대 이전까지 경상도 지역의 주요 도시로서 읍치가 발달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 문화의 흥성에 따라 집성촌이 형성되어 지금까지도 많은 고택이 남아 있다.

[선사 시대의 주생활]

한반도의 선사 시대 주거 형태는 땅을 널찍하게 파고 위에 지붕을 올린 반지하의 수혈식[구덩식] 주거였다. 이 외에도 동굴 주거 혹은 마루가 높은 고상식(高床式) 주거가 드물게 있었다. 상주 지역에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에 관하여 정확하게 밝혀진 내용은 없지만 구석기 시대부터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로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청동기 시대로 보인다. 상주 청리 유적(尙州 靑里 遺蹟)상주 복룡동 유적(尙州 伏龍洞 遺蹟)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구덩식 주거와 장방형[긴네모꼴] 주거가 발굴되었다.

[근대 이전의 주생활과 상주의 고택]

상주 지역에는 근대 이전에 지어진 고택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먼저, 낙동면 양진당길 27-4[승곡리 214-3]에 있는 상주 양진당(尙州 養眞堂)[보물]은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이 1626년에 지은 고택이다.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 규모의 맞배지붕 고상식 ‘ㅁ’ 자 집이며, 퇴칸 전면 의 기둥 6개는 특이하게 하층부는 네모기둥이고 윗부분은 원형으로 다듬었다. 건물을 지면에서 1m 이상 높여 지은 다락집 형태인데, 이러한 점은 여름철 뜨거운 지열의 영향을 줄이는 남방식 가옥의 특징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물게 구들을 설치하여 한겨울 추위에 대비하였으니, 남방식과 북방식의 특징을 고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침의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도 특징적이고 굵은 기둥이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뛰어난 기술적 성숙도로 보아,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되며 조선 시대 주거 유형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례로 손꼽힌다.

외서면 우산리 193-2에 있는 상주 우복 종택(尙州 愚伏 宗宅)[국가민속문화유산]은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의 5세손인 정주원(鄭胄源)[1686~1756]이 영조(英祖)가 내려 준 땅에 지은 종택이다. 정경세는 1602년에 지금의 외서면 우산리에 들어와 남은 생을 보내며 상주 대산루(尙州 對山樓)[보물]를 짓고 1603년 별서(別墅) 기능을 가진 두 칸짜리 초당인 계정(溪亭)을 지었는데, 정경세의 공을 치하하여 영조가 땅을 내리자 정주원 때부터 대대로 살게 된 것이다. 상주 우복 종택은 우복산과 이안천을 끼고 있어 풍수상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에 해당하며,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이 튼 ‘ㅁ’ 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ㄱ’ 자 모양으로 부엌·안방·윗방·대청·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사랑채는 일자형 구조이다. 정조가 하사한 시문판을 소장하고 있고 기제사와 묘제 등 조선 시대 제례가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어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낙동면 운평2길 42-7[운평리 141-1]에 있는 상주 의암고택(尙州 依巖古宅)[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은 모임당(慕任堂) 연안 이씨(延安 李氏)가 1820년 무렵에 지은 건물이며, 1910년 무렵에 개축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대문간채 등 조선 시대 사대부 주택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 당시의 주택을 연구할 때에 유용한 자료이다. 상주 의암고택이라는 건물 이름에 쓰인 ‘의암’은 개항기에 의병을 조직하였던 조범구(趙範九)[1834~1896]의 호로서, 후대인이 조범구를 기리고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상주 의암고택으로 드나드는 대문 앞에 있는 탕건 모양의 큰 바위를 ‘탕건석’이라 하는데, 관습적으로 사람들이 탕건석을 ‘의암’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한편, 상주 의암고택이 있는 낙동면의 운곡마을에는 상주 의암고택 이외에도 여러 재실과 고가, 공동 우물, 초가집, 막돌 담장, 서낭당 등 주거 관련 유적들이 많이 유지되고 있다.

공성면 골가실1길 138-7[봉산리 560]에 있는 상주 취은고택(尙州 醉隱古宅)[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은 공성면 봉산리 골가실마을에서 세거하여 온 여산 송씨(礪山 宋氏) 정가공파(正嘉公派)의 고택이다. 500m 남짓한 토석 담장 안에 안채, 사랑채, 안대문채, 바깥대문채, 우물채, 곳간채 등 건물 6동이 들어서 있다. 17세기에 송덕부(宋德溥)가 골가실로 옮겨 정착하여 창건한 후, 송덕부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거듭 중수하였는데, 늦어도 19세기 전반에는 현재와 같은 형태로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1만㎡의 넓은 대지를 흙돌 담장으로 한 구역을 이루면서 다시 내부 담장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 영역을 분명하게 나누고 커다란 마당 영역을 안채 영역 뒤쪽에 둔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조선 후기의 양반 가옥 구조와 양식적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고,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양반 주택 또는 대지주 주택으로서 장대한 흙돌 담장과 같은 위용을 잘 보여 준다.

이상에서 둘러본 상주 지역의 고택은 영남 지역 반가의 특성인 ‘ㅁ’ 자 집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회적·경제적인 변화에 따라서 일부 부속 건물이 변화하긴 하였지만 종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현대의 주생활]

2022년 현재 상주시의 주택은 총 5만 6015호이며 주택보급률은 127%이다. 상주 지역의 주택 현황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2020년 기준 5만 5054호 중 단독 주택이 4만 1523호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파트도 1만 1780호가 있다. 상주에는 대도시와 같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없지만 아파트 호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등 주거 형태의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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