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남가의 세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1365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은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11월 30일 - 「이경남가의 세충」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
관련 지명 이삼억 사세 충효각 - 경상북도 상주시 동수4길 119-11[무양동 194-1]지도보기
성격 인물 전설|사물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이경남|이지원|이근생|이시발|이삼억
모티프 유형 충신|효자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충효를 실천한 이경남 가문과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경남가의 세충」은 경상북도 상주의 아전이었던 이경남(李景南)과 자손들의 충효를 기리는 인물 전설이면서, 이경남 가문의 충효를 기리는 충효각(忠孝閣)에 대한 사물 전설이기도 하다.

[채록/수집 상황]

「이경남가의 세충」은 2010년 11월 30일 상주시에서 간행한 『상주시사』 4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상주의 아전 이경남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감사대(敢死隊)[죽기를 결단하는 부대]’라고 일컬었다. 상주판관(商州判官) 권길(權吉)[1550~1592]의 휘하에 속하여 활약하였는데, 권길이 이경남을 몹시 아끼었다. 1593년(선조 26) 가을,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이 상주에 주둔할 때는 이경남이 일을 민첩하게 처리하고 병사(兵事)에도 능하여 명나라 장수가 군공(軍功)으로써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1617년(광해 9) 폐모 논의가 분분할 때는 소(疏)를 지어 상경하였으나 소를 올릴 길이 없어 숭례문 아래에서 소를 불사르고 통곡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고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 포위당하였을 때 이경남의 아들 이지원(李枝元)이 관찰사를 좇아 근왕(勤王)하게 되었는데, 이경남은 아들에게 효에 연연하지 말고 충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이듬해에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상주의 동쪽에 있는 동해사(東海寺)에 은거하며 절조를 지켰고, 임종을 당하여서도 맑은 정신으로 의연하게 운명하였다.

이경남의 아들 이지원은 병자호란 때 호장(戶長)으로 도백(道伯)[조선 시대 각 도의 으뜸 벼슬]의 근왕병에 자원하였다. 달천(撻川)에 이르러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한 후 회포를 시로 읊었다. 1644년에는 숭정제(崇禎帝)[1611~1644]의 죽음 소식을 듣고 동해사 일월암(日月庵)에 올라가 단을 베풀고 명나라를 향하여 슬피 울었다. 매년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 세 황제의 제삿날에는 정화수 한 잔으로 분향하고 절하였으므로 일월암의 단을 ‘대명단(大明壇)’이라 일컬었다. 이지원은 사후에 군자정(軍資正)에 증직되었다.

이지원의 아들 이근생(李根生)은 19세에 호장(戶長)이 되었다. 가세충효(家世忠孝)로써 관장(官長)의 장려한 바였다. 이근생은 관아의 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공수(拱手)하고 지났으며 집에 물러나 있더라도 관가의 벽제 소리가 나면 반드시 뜰에 내려와 엄숙히 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다. 병을 치료하느라 동해사에 있는 동안 회갑을 맞이하였는데, 아들들에게 글을 보내어 나라가 어렵고 부모가 계시지 않아 비통하니 빈객을 청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뒤에 참의(參議)로 증직되었다.

이근생의 아들 이시발(李時發)이 1690년(숙종 16)에 정조호장(正朝戶長)으로서 임금을 뵈었을 때는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가 폐서인이 되어 사제에 있었다. 임금을 만나고 난 후 여러 호장들과 신하 된 도리로 인현왕후에게 인사를 드리자 하였으나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이시발이 탄식하며 홀로 서궁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이시발의 아들은 이삼억(李三億)이다. 1721년(경종 1)에 조정만(趙正萬)[1656~1739]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남성루(南城樓)를 중수할 때 이삼억이 역사를 감독하여 일을 마쳤다. 이삼억이 편액을 ‘홍치구루(弘治舊樓)’라고 하고 중수기를 지어 올렸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1728]의 난 때에는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충분(忠憤)이 감개(感慨)하여 아전을 엄히 단속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지는 일에 죽을 각오로 임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이삼억의 아들은 이경번(李慶蕃)이다. 1749년(영조25) 이경번이 정조호장(正朝戶長)으로 상경하였는데, 임금이 각 읍 호장들을 입시하라 하여 이경번도 함께 나아갔다. 중문에 도착하여 뜰 아래 부복하여 있으니 임금이 상주 호장을 불러 주민에게 질고(疾苦)가 없는지 물었다. 이경번은 성상의 은덕으로 모두 편안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향리의 아전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었다. 이경번이 “임금님 바로 앞에서 입으로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지필로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지필묵을 내리게 명하니 이경번이 지필묵을 받아 뜰 아래 물러가 의견을 바르고 똑똑하게 써서 올렸다. 임금이 글을 보고 “먼 시골의 호장이 이와 같이 박식하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이경번에게 특별히 통덕랑(通德郞)을 내리고 궁중에서 빚은 술을 하사하였다. 이경번과 여러 호장이 사배(四拜)의 예를 행하고 궐문을 나서니, 내관이 자리를 베풀고 술상을 갖추어 상주 호장을 불러 어명을 전하였다. 그러자 이경번이 나아가 술을 마시고 사은을 표하였다. 주위에 여러 호장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며 부러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상주시 무양동에 있는 충효각은 이삼억이삼억의 아들 이경번, 증손 이연하, 현손 이복운의 사대에 걸친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유림에서 건립한 것이다. 이삼억의 증손 이연하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중병을 앓을 때 청계산(淸溪山)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해송자(海松子)[잣] 한 알을 주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어머니의 장례 때는 어떤 신선이 꿈에 나타나 묏자리를 정하여 주어 ‘효갑소’라 하기도 하였다. 이삼억의 현손 이복운의 부인 연안 차씨는 남편을 여읜 뒤 40여 년을 혼자 지내면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모티프 분석]

「이경남가의 세충」의 주요 모티프는 ‘충신’과 ‘효자’이다. 이경남을 비롯하여 이경남의 자손들은 모두 충절과 효성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이경남가의 세충」은 설화로 전승되고 있지만 실존하였던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어 전승자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준다. 무양동에 있는 충효각은 이삼억 이하 후손들의 충효를 기리는 것인데, 이삼억의 증손 이연하에 대한 이야기에는 호랑이와 꿈 등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실이 세대를 거듭하여 전승되면서 설화적 윤색을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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