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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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Sangju sericulture, a Silk Road Tradition that Continues in Hamcha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노광 |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가 이어 오는 전국 최대 명주 생산지로서의 역사와 문화, 가치에 관한 이야기.
[개설]
상주시의 명주는 상주쌀, 상주곶감, 상주한우와 함께 상주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상주 지역은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잠사업(蠶絲業)이 크게 발달하였고, 전국 최대 양잠업 주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상주의 양잠업은 특히 일제 강점기에 매우 번성하여 1943년에는 연간 누에고치 생산량이 7000만 톤을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한때 쇠퇴하였던 양잠업은 정부에서 양잠업을 장려하면서 1962년을 고비로 되살아났고 1968년 상주 지역 양잠 농가와 양잠 생산량은 전국 최고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합성 섬유의 발달과 일본의 수입 금지 조치, 1980년대 중국과의 수교 이후 값싼 중국산 명주가 수입되면서 상주 양잠업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점점 쇠락하던 양잠업은 1990년대 중반 건조 누에, 수번데기, 동충하초, 오디 등을 생산하는 기능성 양잠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상주시는 전국 최대 명주 생산지였던 상주 명주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2013년 함창명주박물관을 개관하고 함창명주테마파크를 조성하는 등 다각도로 노력한 결과 전국 최대 명주 생산지를 자랑하며 국내 양잠업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고부가 가치 첨단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양잠업을 의료 산업과 식품 산업, 관광 산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상주 양잠업의 흥망성쇠]
조선 시대를 거치며 크게 발달한 상주 지역의 양잠업은 일제 강점기 가장 번성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잠업 육성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1914년 일제는 양잠 농가에 세잠누에[유충 때 세 번 자고, 세 번 허물을 벗는 누에]를 보급하고, 1919년에는 1대 교잡종 사육을 장려하는 등 누에 품종을 단일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누에고치 생산량이 급증하였고 뽕나무 재배 면적도 확대되었다.
일제는 우량 잠종(蠶種)을 일괄 공급하는 한편 재상장려원(栽桑奬勵員)을 두고 뽕나무를 심을 적합한 땅을 선정하여 식재한 뒤 영농 기술을 지도하였고 면별로 양잠 교육을 실시하는 등 세밀하게 관리하였다. 이후 상주는 김천, 안동과 함께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누에고치 생산지로 성장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잠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1913년 경상북도에 잠업취체소(蠶業取締所)를 설립하였고, 1919년에는 양잠업을 장려하고 우량 잠종의 생산을 증대하기 위하여 「조선잠업령(朝鮮蠶業令)」을 제정하였다. 1921년 상주에 설립된 상주공립농잠학교(尙州公立農蠶學校)[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는 「조선잠업령」을 기초로 세워진 학교였다.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상주에 세워진 것은 상주가 잠업이 가장 번성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3년제 을종 학교였던 상주공립농잠학교는 1940년에는 5년제 갑종 학교로 승격하였다. 상주 양잠업은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더욱 번성하였고, 1943년에는 연간 누에고치 생산량이 7000만 톤을 넘었다.
해방 이후 나일론 등 인조 섬유의 범람과 정책 당국의 무관심으로 일시 쇠퇴하였던 양잠업은 정부에서 양잠업을 장려하면서 1962년을 고비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1962년부터 197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잠업 증산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잠사업을 근대 산업으로 육성시켰다. 당시 정부는 100억 원을 투입하여 뽕나무 묘목 구입 대금 80%를 보조하는 한편 비료를 무상 지원하였으며, 잠실(蠶室) 건립비를 보조금과 융자금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생산된 누에고치는 공동 판매제를 적용하여 사업 구역을 배정받은 제사 공장이 정부 고시 가격으로 수매하도록 하였다. 이에 힘입어 1968년 상주의 양잠 농가와 양잠 생산량은 전국 최고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당시 상주의 양잠 농가는 전국 양잠 농가의 45.5%를 차지하던 경상북도 전체 양잠 농가의 10%를 점하는 규모였고, 생산량도 전국 최고 수준에 이르러 양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누에고치와 명주는 1970년대 후반까지 일본에 수출되어 상주의 양잠업과 제사업은 함창읍, 이안면, 공검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집 건너 한 집이 누에 치고 명주 짜는 집일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수입 금지 조치, 1980년대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져 값싼 중국산이 밀려들어 오면서 양잠업과 제사업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상주 명주의 오랜 전통도 거의 사라지고 소규모로 스카프, 천연 염색 원단 등을 생산하며 명주 산업의 명맥만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건조 누에, 수번데기, 동충하초, 오디 등을 생산하는 기능성 양잠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아 양잠 농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상주에서는 명주 생산의 명맥을 이어 오던 농가들이 힘을 합쳐 2009년 ‘명주잠업영농조합법인’을 세우고 상주 명주의 전통과 명성을 되살리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고, 상주시가 명주 생산 농가들을 지원하면서 다시 양잠 농가가 조금씩 늘어났다.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방식의 명주 생산지로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상주는 현재에도 국내에서 명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다. 2021년 현재 상주시의 양잠업 농가는 73가구, 뽕밭 면적은 27.8㏊, 양잠업 생산량은 7만 5053㎏이다. 누에고치 생산량은 2,610㎏이며 경상북도 전체 생산량의 31%를 차지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어 두 번째 순위에 해당한다.
[상주 양잠의 산 역사, 두곡리 뽕나무]
은척면 두곡리에는 양잠업의 본고장인 상주의 오랜 양잠 역사와 전통을 실증하는 상주 두곡리 뽕나무가 있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상주 두곡리 뽕나무의 수령은 약 400년이며 높이는 약 12m이고, 가슴 높이 둘레는 2.75m의 노거수(老巨樹)이다. 지상 1.8m에서 3갈래로 갈라진 가지는 동쪽 가지는 2.3m, 서쪽 가지는 4m, 북쪽 가지는 4.3m 뻗어 있다.
상주 두곡리 뽕나무는 지금도 누에고치 30㎏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뽕잎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매년 많은 양의 오디가 열릴 정도로 수세도 양호하다. 상주 두곡리 뽕나무는 1972년 12월 2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호 ‘은척면의 뽕나무’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2월 3일 국가지정문화유산 천연기념물 제559호로 승격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천연기념물로 변경되었다. 두곡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주 두곡리 뽕나무 외에도 가슴 높이 둘레가 1.1~1.75m나 되는 뽕나무가 네 그루 더 남아 있다.
[명주를 짜는 과정과 상주 지역 「길쌈 노래」]
우리나라 양잠의 기원은 4,300년 전 단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삼한과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이 양잠을 장려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건국 초부터 잠업을 권장하였다. 조선의 비단은 직조 기술과 품질이 뛰어나 실크로드를 따라 서양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누에고치에서 풀어 낸 견사로 짠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 치기-명주실 나르기-명주실 풀 먹이기-잉아 만들기-베틀로 직물 짜기라는 지난(至難)한 작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명주를 짜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명주 짜는 순서
앉을깨에 바로 앉아서 왼손에는 ‘북’을, 오른손에는 바디집을 잡고 오른발에는 베틀신을 신는다. 오른발을 뒤로 잡아당기는 순간 잉앗실이 절반의 날실을 왼쪽으로 당겨 올리므로 날실은 두 갈래로 벌어진다. 두 갈래로 벌어진 틈 사이로 왼손에 잡고 있던 북을 밀어 넣고 오른손으로 밀고 있던 바디집을 놓고 미끄러지는 북을 오른손으로 받아 어깨 쪽으로 북을 옮긴다. 왼손으로는 오른손에서 떠난 바디집을 잡아 앞[말코 쪽]으로 잡아당겨 베 바닥을 친다. 이 순간 꾸리실[씨실]이 북에 실려 날실 사이를 통과하여 바디를 치는 힘에 의하여 한 올의 명주가 짜진다. 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명주 짜기는 이러한 과정을 밤낮없이 반복하여야 하는 힘든 노동이다. 명주를 짜던 아낙네들은 힘든 노동의 시름을 「길쌈 노래」를 부르며 달랬다.
2. 상주 지역에 전하는 명주 「길쌈 노래」
은장도라 드는 칼로 어석어석 끊어 내어
은척에도 마흔 자 놋척에도 마흔 자
큰 냇물에 빨아다가 앞 냇물에 헹궈다가
울타리에 고이 걸어 백옥같이 바래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에 휘감아서
뚝딱뚝딱 다다미를 곱게 곱게 두드려서
한 필일랑 나라님께 한 필일랑 임의 직령
[함창에서 재현되는 상주 명주의 전통]
함창 지역은 신라 시대부터 양잠과 더불어 명주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며, 1980년대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통 명주장(明紬場)이 닷새마다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함창 지역에서는 지금도 전통 방식으로 명주를 생산하며 전통 비단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 함창명주는 명주를 전통 직조 방식인 습식[씨실에 물을 먹여 짜는 방식]으로 제조하는 국내에서 유일한 명주이다. 습식 방식으로 직조를 하면 조직이 탄탄하여 내구성이 좋고 가공하였을 때 윤기가 많이 난다고 한다.
함창명주는 함창읍과 이안면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만큼 생산량은 많지 않아 연간 10만 필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전통 명주의 90% 정도를 차지한다. 함창 지역에서 명주를 생산하는 업체는 허씨비단직물[오동리], 장수직물[교촌리], 상주명주[교촌리], 일광직물[구향리] 등 4개 사가 있다.
함창 지역 명주 생산 업체들은 경상북도 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이 경상북도 인근 지역에서 수매한 누에고치로 만든 생사를 매년 500~1,000㎏ 정도를 공급받아 국산 명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국산 생사로 짜는 명주는 따로 생산하여 경상북도 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에서 공인하는 절차를 거쳐 별도로 판매하고 있는데 주로 유물 복원이나 공공 기관의 수요에 충당하고 있으며 수의 등 의류는 주문 제작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상주시는 명주의 역사와 유래, 명주 짜기의 전통을 후세에 알리고 천연 섬유인 명주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명주를 전통 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는 함창읍에 2013년 함창명주박물관을 개관하고, 함창명주박물관 일대에 함창명주테마파크를 조성하였다. 상주 시내에 있던 경상북도 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도 2013년 함창명주테마파크 내로 이전하였다. 경상북도 농업자원관리원 잠사곤충사업장에서는 우량 누에 씨를 생산·보급하고 누에 유전 자원 계통 보전, 애누에 공동 사육 공급, 뽕밭 관리, 동충하초 종균 공급, 유용 곤충 자원 산업화, 기능성 양잠 산업 시험 및 연구 개발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상주시는 전국 제일의 양잠업 주산지의 명성을 지키고 전통 산업 발전을 위하여 뽕밭 조성 및 명주 직기 개량, 건강 기능 식료품 개발 사업 등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양잠업이 고부가 가치 첨단 바이오 산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양잠업을 의료 산업, 식품 산업, 관광 산업으로 확대하여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