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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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민족운동,민족해방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전국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해방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는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대한제국이 패망한 이후 한국이 독립하는 1945년 8월까지 36년간이다. 일제 강점기는 1910년대 무단 폭압 정치기, 1920년대 이른바 문화정치기, 1930년 이후 1945년 8월까지 일본 군국주의의 전시 체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 민족은 치열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 무단 폭압 통치하의 독립운동]
한국을 병탄한 1910년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로 불리는 민족말살정책으로 시작하여 1919년까지 식민 통치를 이어 갔다. 우선 일제는 친일 세력을 조성하여 민족의식을 와해시키는 파괴 공작을 획책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의 한국병합과 지배에 반대하는 단체와 개인의 투쟁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은 풍기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 활동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한편으로는 만주나 노령 등지의 독립군 기지로 활동 무대를 옮겨 갔다.
상주 지역의 경우, 강순필(姜順必)·노병대(盧炳大)·채기중(蔡基中) 등의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풍기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중 채기중은 풍기광복단의 결성과 대한광복회 결성 및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사용(金思容)과 조필연(趙必淵)은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석주 이상룡의 사위 강호석(姜好錫)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3월 중순까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동포 사회로 전파되었다. 상주 지역에서는 강용석(姜龍錫)·성해식(成海植)·석성기(石盛基)·성필환(成必煥)·조월연(趙月衍) 등이 주도하는 만세운동이 상주 장터에서 일어났다. 또한 채세헌(蔡世鉉) 등이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에서, 이성범(李聖範)·이용회(李容晦) 등이 4월 8일 화북면 장암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문화 정치하의 독립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 1920년대 소위 ‘문화정치’하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운동 방략과 노선, 그리고 이념적인 계열 및 세력으로 분화되었고,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독립운동계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진영과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민족주의 진영은 ‘절대 독립(絶大 獨立)’을 목표로 즉각적인 독립의 쟁취를, 민족개량주의 진영은 ‘독립 준비론(獨立 準備論)’의 논리에 입각하여 ‘민족성의 개조’와 ‘자취권의 획득’을 표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대 후반기는 사회주의운동의 성장에 따른 항일운동의 다양화와 질적 발전이 두드러지는 시기였다.
상주 지역의 경우,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성순(趙誠淳)·류우국(柳佑國)·조태연(趙台衍) 등은 1919년 6월 선산 출신의 최재화가 주도한 무관학교 생도 모집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만주로 망명하였고, 김규헌(金奎憲)·김재명(金在明) 등은 1922년 영주 출신 김찬규가 주도한 의용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김사용은 1923년 3월 의열단 폭탄 반입 사건과 1919년 신흥무관학교 학우단에 관련된 문상직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 외 상주 인봉동 출신의 김재수(金在洙)는 1920년과 1925년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주 중동 출신 류우국은 1925년 4월 남형우·배천택 등과 함께 다물단(多勿團)에 참여하는 등 중국에서 활동하였고, 상주 화북 출신 박열(朴烈)은 일본에서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무정부주의 항일 독립운동을 벌였다.
한편, 상주 지역에서는 1920년대 학생·여성·청년·노동·농민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한층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청년운동은 1919년 이후 상주청년회를 비롯하여 모두 24개의 청년운동 단체가 결성되어 강연회, 토론회, 체육 활동, 오락 활동, 사회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상주청년회는 1925년 8월 예천의 형평분사가 습격받은 반형평사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 대책을 강구하여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외 여성운동은 1926년 10월 창립된 상주여자기독청년회가 주목되며, 신간회운동은 1928년 신간회 상주지회가 설립되어 전 민족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30~1940년대 전시 체제하의 독립운동]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소위 ‘15년 전쟁’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준전시 체제와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의 전시 체제,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의 비상 전시 체제로 이행되었다. 전시 체제하 식민지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파쇼화 폭압 통치와 대륙 침략전의 병참기지로서 지배와 수탈 정책을 감내하여야 하였다. 1930년대 이후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전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30년대 파쇼적인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1932년을 고비로 모든 항일 독립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조직으로 전환되어 갔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기조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 대한 사상 탄압을 강화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은 매우 침체되었다. 전시 체제하 민족 지사들은 국내외에 걸쳐 언론·종교·교육기관 등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저항하였고, 학생·노동자·농민들은 비밀결사 활동, 노동쟁의, 소작쟁의로 일제에 저항하여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무장투쟁 준비론과 실력양성론적 독립 준비론을 방략으로 하는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상주 지역의 경우, 1930~1940년대 전시 체제하의 독립운동은 1943년 8월 안동농림학교 재학 중이던 상주 출신 강동석(姜東錫)의 조선회복연구단 사건, 1944년 상주 출신 성익환(成益煥)의 흑백당(黑白黨) 사건 등이 주목된다. 한편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투신한 상주 출신 김길상(金吉相), 김만식(金萬植), 김영이(金榮伊), 박하규(朴夏圭), 이창재(李昌宰), 한상열(韓相烈) 등의 활동도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