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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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盛基 |
영어공식명칭 | Seok Seong-gi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 석성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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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3일 - 석성기 상주 장터 만세 시위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28일 - 석성기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70년 - 석성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8월 15일 - 석성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3일 -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 시작 |
출생지 | 성동동 - 경상북도 상주시 성동동 |
학교|수학지 | 경성국어보급학관 -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석성기(石盛基)[1902~1970]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활동 사항]
석성기는 1902년 경상북도 상주시 성동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3일 경성국어보급학관(京城國語普及學館) 학생으로서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상주 장터 만세시위운동은 3월 중순부터 석성기를 비롯한 한암회(韓岩回), 강용석(姜龍錫), 조월연(趙月衍), 성필환(成必煥) 등 서울 유학생과 상주 지역 학생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석성기를 비롯한 학생들은 전국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3월 23일 상주 장날에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먼저 한암회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자, 시장의 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본군 헌병이 한암회를 붙잡고 해산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6시 40분경 성해식(成海植)이 군중 약 300명을 향하여 “나는 천한 사람이기는 하나, 이번에 조선이 독립한다 하니 제군과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한다”라고 말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3번 선창하였다. 이에 시장에 있던 군중과 학생이 적극적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밤이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석성기는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주도자 4명과 함께 붙잡혀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성기는 1970년 사망하였다.
[묘소]
석성기의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석성기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