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100504
한자 古代
영어공식명칭 Anci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방용철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상북도 상주 지역은 서쪽으로 소백산맥과 남쪽으로 낙동강을 품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초기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 부르는 초기 국가가 성장하였다. 사벌국석우로(昔于老)에 의하여 정벌됨으로써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후 사벌주(沙伐州)·상주(上州) 등으로 편제되며, 신라가 삼국 통일 및 당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지금의 명칭인 상주(尙州)로 개칭하였으며, 9주(州) 5소경(小京)의 하나인 상주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초기 국가, 사벌국]

상주 지역에서는 낙동강에서 비롯된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소백산맥을 넘나들 수 있는 주요 교통로로서의 이점을 배경으로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사벌국이 번영을 구가하였다. 사벌국은 상주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병성천동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사벌 들판을 바탕으로 성장하였으며, 사벌 들판 북쪽 구릉 위에 자리한 이부곡 토성(吏部谷 土城)이 국읍(國邑)으로 기능하였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 사벌국면을 중심지로 하여 병성천 수계에 해당하는 상주시 중심부와 병성동, 낙동강을 접하고 있는 낙동면중동면 일대까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진한(辰韓)의 강국으로 발전한 사벌국은 교통로상 결절점에 자리한 이점을 살려 마지막까지 신라의 세력 확장에 맞섰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석우로전에는 “[첨해왕 때] 사량벌국은 예부터 우리에게 속하여 있었는데, 갑자기 배신하여 백제에게 귀의하므로 석우로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첨해이사금[재위 247~261] 시대라는 연대는 그대로 따르기 어렵지만 신라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사벌국이 백제와 교섭 혹은 연대를 통하여 자구책을 모색하였던 정황은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신라는 사벌국 정벌을 통하여 진한 소국의 통합을 마무리한 만큼 사벌국을 공략하기 힘든 상대로 인식하였고, 백제 또한 신라에 버금가는 사벌국의 국력과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 시대]

상주 지역의 위상은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핵심 교통로로서 신라와 백제의 공방전이 치열해질수록 더욱 부각되었다. 신라가 사벌국을 정벌할 때 백제와의 관계를 명분으로 하였듯이 고대 상주 지역의 운명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삼국 시대 신라의 중요한 지방 도시가 행정보다는 군사적 기능에 치중하였고, 지방관 또한 군사 지휘권자로서 무관(武官)이 절대 다수였음을 고려하면 상주의 발전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525년 법흥왕이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을 사벌주 군주(軍主)로 임명하고, 상주(上州)라고 하였던 사실이 보인다. 신라가 중앙의 정예 병력을 배치하여 소백산맥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포석을 놓는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 요충지로 상주 지역에 주목한 조치였다. 660년 6월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에도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은 전쟁 기간 내내 금돌성에 머무르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고, 금돌성에서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기록에는 신라고전(新羅古傳)을 인용하면서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를 토벌하였는데, 또한 신라까지 토벌하려는 의도로 계속 머물렀다. 김유신이 음모를 알아채고는 당나라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독주를 먹여 모두 죽이고는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는 세간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소정방과 당나라 군사들을 묻은 장소가 상주 외곽의 당교(唐橋)라고 지목한 것인데, 상주 지역이 삼국 통일은 물론 당과의 전쟁에서도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암시한다. 당교는 상주시 함창읍과 문경시 모전동을 잇는 모전천(茅田川)에 있었다는 다리이다.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재위 681~692]은 통일국가에 걸맞은 지방 제도를 마련하여 685년 전국을 9주 5소경 체제로 개편하였다. 개편 당시 상주(上州)의 치소는 일선주(一善州)이며,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였다. 2년 후인 687년, 신문왕은 본래 상주의 중심지였던 사벌주로 치소를 되돌리는 한편 1,109보 둘레의 성을 쌓게 하였다. 이때부터 사벌주는 신라 9주의 한 곳으로 위상을 유지하였으며, 영남을 대표하는 도회지로 번영하였다. 사벌주는 대체로 10개 군(郡)과 30개 현(縣)을 관장하였고, 청효현(靑驍縣)[상주시 청리면]과 다인현(多仁縣)[의성군 다인면] 그리고 화창현(化昌縣)[상주시 외서면으로 추정]은 직속으로 두었다. 757년 경덕왕이 전국의 군현 명칭을 고칠 때 상주(尙州)라고 하였다.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된 상주 복룡동 유적(尙州 伏龍洞 遺蹟)은 통일 신라 시대에 번창하였던 지방 도시 사벌주의 면모를 보여 준다. 특히 격자형 도시 구획 및 가로망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 및 주거 공간 등이 나뉘는 이방제의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된 사실은 주목된다. 복룡동 일대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방(坊)의 흔적은 구역 내부에서 드러난 주거 유적이나 도로 유구, 도로에 딸린 배수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상 유구(溝狀 遺構) 등을 통하여 증명된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의 배수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는 구상 유구와 추정 도로 유구 등은 서쪽으로 500m가량 떨어져 있는 상주 읍성 일대의 시가지 구획 및 동서 가로망과 연결되는 것으로 밝혀져 고려는 물론 조선 시대까지 온전한 기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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