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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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정목주 |
[정의]
1196년부터 1862년까지 경상북도 상주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열린 시회.
[개설]
낙강시회(洛江詩會)는 1196년(명종 26) 6월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난을 피하여 상주로 와서 낙강(洛江)[현재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회를 가진 이래, 1862년(철종 13)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1813~1872]의 시회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의 시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연원과 배경]
낙강시회의 연원은 멀리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식(蘇軾)[1036~1101]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식은 1082년 음력 7월 16일과 음력 10월 15일에 적벽(赤壁)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면서 천하의 명문장인 「적벽부(赤壁賦)」를 남겼다. 일명 ‘소노적벽지유(蘇老赤壁之遊)’이다. 이후 음력 7월 16일이 되면 소식의 적벽유(赤壁遊)를 본떠 강에 배를 띄우고 시문을 짓는 뱃놀이가 유행하게 되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열린 낙강시회 역시 소식의 적벽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낙강유의 일차적 목적은 적벽유를 낙강유(洛江遊)로 재현하려 한 데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낙강의 뛰어난 경치를 통하여 이루어진 문학 작품으로서의 결과물이 단순히 적벽유의 재현물이 아니라 낙강유의 창조물이 되게 하는 데 있었다. 낙강유를 통한 창조적 결과물이 바로 상주 선비들의 공동 시집인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일명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과 『홍판관운(洪判官韻)』이다.
낙강시회의 공간적 배경은 상주의 낙강, 곧 낙동강이다. ‘낙동강 700리’[약 275㎞]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자천대(自天臺)[경천대(擎天臺)]로부터 도남서원(道南書院), 죽암(竹巖), 합강정(合江亭)을 거쳐 관수루(觀水樓)에 이르는 30여 리[약 11.8㎞]의 구간이다. 특히 낙동강은 상주인들에게 특별한 강으로 인식되고 있다. 낙강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가 된 신귀(神龜)가 출현한 낙수(洛水)와 연관되어 도학(道學)의 정통맥이 끊이지 않는 강이란 상징성을 지녀 왔다.
그리하여 낙동강 무임포(無任浦)에 동국(東國) 유도(儒道)의 정통성이 영남에 있음을 천명하는 도남서원을 창건함으로써 상주 선비들에게 낙동강은 명승지로서만이 아니라 자긍심을 일깨우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도남서원은 영남의 으뜸 서원으로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 창석(蒼石) 이준(李埈)[1560~1635]을 봉안하여 향사(享祀)하는 서원이다.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모셨다는 점에서 도남서원의 위상과 뿌리 깊은 상주 유학의 맥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상주는 예로부터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살 만한 고장이라 하여 상산(商山)이란 별호가 있었기 때문에 낙강은 ‘상산낙수향(商山洛水鄕)’의 강으로서 상주인의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자연미와 인공미[도학과 사상, 그리고 문학]가 조화를 이룬 선유시회(船遊詩會)의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내용]
낙강시회의 역대 명칭을 보면, ‘낙강범주유(洛江泛舟遊)’, ‘낙강환영연(洛江歡迎宴)’, ‘낙강관수루회(洛江觀水樓會)’,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 ‘낙강선유시회(洛江船遊詩會)’, ‘낙강도원회(洛江道院會)’, ‘낙강도원문회(洛江道院文會)’ 등 시회의 명칭이 다양하다. 명칭 앞에는 모임을 주최한 사람의 호(號)를 붙여 해당 시회의 명칭으로 삼았다. 각각 시회의 취지나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낙강’과 ‘시’라고 하는 근본 취지는 공통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역대 낙강시회를 연 시기와 명칭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병진년[1196] 백운낙강범주유(白雲洛江泛舟遊)
2. 계미년[1343] 근재낙강환영연(謹齋洛江歡迎宴)
3. 신묘년[1471] 점필재낙강관수루회(佔畢齋洛江觀水樓會)
4. 신해년[1491] 뇌계낙강범주시회(㵢溪洛江泛舟詩會)
5. 병진년[1496] 탁영·수헌낙강관수루회(濯纓·睡軒洛江觀水樓會)
6. 을미년[1534] 퇴계낙강관수루회(退溪洛江觀水樓會)
7. 신미년[1571] 정정공낙강관수회(貞靖公洛江觀水樓會)
8. 정미년[1607] 상목낙강범주시회(尙牧洛江泛舟詩會)
9. 신유년[1621] 현주낙강범주유(玄洲洛江泛舟遊)
10. 임술년[1622] 창석낙강범월시회(蒼石洛江泛月詩會)
11. 임술년[1622] 창석속낙강범월시회(蒼石續洛江泛月詩會)
12. 정유년[1657] 호옹낙강범주시회(湖翁洛江泛舟詩會)
13. 임술년[1682] 사우당낙강범주시회(四友堂洛江泛舟詩會)
14. 무자년[1768] 정와낙강선유시회(靜窩洛江船遊詩會)
15. 경인년[1770] 지옹낙강범월속유(芝翁洛江泛月續遊)
16. 무술년[1778] 강세로낙강범월유(姜世魯洛江泛月遊)
17. 계미년[1623] 전후 이재낙강매호복거(頤齋洛江梅湖卜居)
18. 연대 미상[17세기 초반] 동고낙강삼탄범월유(東皐洛江三灘泛月遊)
19. 병자년[1636] 우담낙강자천대복거(雩潭洛江自天臺卜居)
20. 신묘년[1651] 호옹낙강매호범월시회(湖翁洛江梅湖泛月詩會)
21. 연대 미상[1600년대 초반] 창주낙강매오방선(滄洲洛江梅湖放船)
22. 계묘년[1663] 목재낙강도남서원회(木齋洛江道南書院會)
23. 병자년[1696] 상목낙강자대유(尙牧洛江自臺遊)
24. 무인년[1698] 야촌낙강도원회(野村洛江道院會)
25. 연대 미상 봄 이길보낙강도원회(李吉甫洛江道院會)
26. 연대 미상 8월 부훤당낙강범주유(負暄堂洛江泛舟遊)
27. 을묘년[1699] 전천서낙강도원회(全天敍洛江道院會)
28. 정해년[1707] 부훤당낙강자대유범주(負暄堂洛江自臺遊泛舟)
29. 연대 미상 봄[1708~1716] 성주서낙강범주(成周瑞洛江泛舟)
30. 연대 미상 1월[1708~1716] 서강낙강도원회(西岡洛江道院會)
31. 정유년[1717] 우헌낙강도원수창(愚軒洛江道院酬唱)
32. 연대 미상 가을[1718~1725] 노은낙강도원차홍목재운(老隱洛江道院次洪木齋韻)
33. 연대 미상 봄[1719~1725] 권박낙강범주(權煿洛江泛舟)
34. 병자년[1726] 성중진낙강송대유(成仲晉洛江松臺遊)
35. 무오년[1738] 쌍백당낙강도원회(雙白堂洛江道院會)
36. 무오년[1738] 쌍백당낙강도원차홍목재운(雙白堂洛江道院次洪木齋韻)
37. 계해년[1773] 강세진낙강도원차홍목재운(姜世晉洛江道院次洪木齋韻)
38. 기유년(1789) 강백흠낙강도원차홍목재운(姜伯欽洛江道院次洪木齋韻)
39. 무오년[1798] 남애낙강도원차홍목재운(南厓洛江道院次洪木齋韻)
40. 연대 미상[1664~1667] 무첨재낙강범월시회(無忝齋洛江泛月詩會)
41. 연대 미상[1664~1675] 백원유낙강(百源遊洛江)
42. 무인년[1698] 박천낙강범월시회(博泉洛江泛月詩會)
43. 갑신년[1724] 식산낙강도원문회(息山洛江道院文會)
44. 병인년[1746] 상목낙강무우정시회(尙牧洛江舞雩亭詩會)
45. 무진년[1748] 청대낙강도원문회(淸臺洛江道院文會)
46. 임술년[1802] 입재낙강범월유(立齋洛江泛月遊)
47. 신미년[1811] 임하낙강범주시회(林下洛江泛舟詩會)
48. 병자년[1816] 입재낙강도원문회(立齋洛江道院文會)
49. 연대 미상[1817~1820] 곡구낙강자천대범월(谷口洛江自天臺泛月)
50. 무자년[1828] 강고낙강범주시회(江皐洛江泛舟詩會)
51. 임술년[1862] 계당낙강범주시회(溪堂洛江泛舟詩會)
위와 같이 1196년에 이규보가 낙강에 배를 띄우고 시회를 처음 가진 이래, 1862년 류주목의 시회까지 666년 동안 총 51회의 시회를 열었다.
역대 낙강시회를 주최한 문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규보, 안축(安軸)[1282~1348], 김종직(金宗直)[1431~1492], 김일손(金馹孫)[1464~1498], 권오복(權五福)[1467~1498], 이황(李滉)[1501~1570], 강신(姜紳)[1543~1615], 조찬한(趙纘韓)[1572~1631], 이전(李㙉)[1558~1648], 이준(李埈)[1560~1635], 조정(趙靖)[1555~1636], 조익(趙翊)[1556~1613], 류진(柳𥘼)[1582~1635], 전식(全湜)[1563~1642], 전극항(全克恒)[1590~1636], 전극념(全克恬)[1597~1660], 조우인(曺友仁)[1561~1625], 강사상(姜士尙)[1519~1581], 홍여하(洪汝河)[1620~1674], 손만웅(孫萬雄)[1643~1712], 채득기(蔡得沂)[1605~1646], 조정융(曺挺融)[1598~1678], 정도응(鄭道應)[1618~1667], 신석번(申碩蕃)[1596~1675], 이옥(李沃)[1641~1698], 이만부(李萬敷)[1664~1732], 권상일(權相一)[1679~1759], 조천경(趙天經)[1695~1776], 이승연(李承延)[1720~1806], 정종로(鄭宗魯)[1738~1816], 이경유(李敬儒)[1750~1821], 류심춘(柳尋春)[1762~1834], 류주목(柳疇睦) 등이다. 상주의 선비, 영남의 선비, 기라성 같은 조선의 선비들이 대거 참여하여 시회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낙강시회는 666년 동안 총 51회 개최되면서 상산 낙강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시간을 초월하여 범낙강시단(凡洛江詩壇)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범낙강시단은 성격 면에서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임술범월록』과 『홍판관운』[목재(木齋) 홍여하가 도남서원 일관당(一貫堂)이 소실되어 중수한 뒤에 지은 중수시(重修詩)와 차운(次韻)한 시들을 모아 엮은 공동 시집]을 중심으로 한 각종 시회는 동일한 목적 아래 뜻이 같은 문인들이 대를 이으며 시단을 형성하고 공동 시집도 펴내었다. 명실공히 상주의 2대 낙강시단(洛江詩壇)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임술년 낙강범월시회를 계승한 시단을 임술시단(壬戌詩壇)이라 하고, 『홍판관운』을 계승한 시단을 목재시단(木齋詩壇)이라고 약칭한다. 각 시단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임술시단이 남긴 공동 시집 『임술범월록』은 1607년 ‘상목낙강범주시회’를 필두로 1622년 ‘창석낙강범월시회’를 거쳐 1778년 ‘강세로낙강범월시회’까지 총 8회 171년간의 시회와 작품을 수록하였다. 시집의 제작 목적은 창석(蒼石) 이준의 유지, 곧 “낙강시회를 누가(累加) 기록하여 이를 도남서원에 갈무리하고 뒷날 이 시회를 잇는 자들의 선구(先驅)가 되게 하라”[낙강범월시서(洛江泛月詩序)]는 것을 따른 것이다. 각 시회의 목적은 임술년[1082] 7월 16일 소식이 적벽에서 논 것처럼 상산 낙강에서 놀며 촉경성취(觸景成趣)[풍경에 감촉되어 취미를 이룸]함에 있었다. 수록된 작품은 서발(序跋) 13편, 연구시(聯句詩) 2수, 배율시(排律詩) 31수, 칠언율시(七言律詩) 86수, 부(賦) 32편, 사(詞) 1편 등인데, 1771년 조천경 등이 고증하고 책으로 엮어 표제를 ‘임술범월록’이라고 하였다.
목재시단이 남긴 공동 시집 『홍판관운』은 1663년 ‘목재낙강도남서원시회’로부터 1798년 ‘남애낙강도원차홍목재운’까지 18회 135년의 시회와 작품을 수록하였다. 목재시단을 형성하였던 시회의 주된 목적은 향사나 강학 위주의 문회(文會)에 있었으나, 여가에 시회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시회의 주최자는 상주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다른 지방 사람들도 있었다. 시회 장소는 도남서원 경내와 경천대까지의 선유(船遊)가 반반이었다. 수록된 작품은 서(序) 3편, 오언절구(五言絶句) 20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8수, 오언배시(五言排詩) 15수, 칠언율시 55수, 칠언연구시(七言聯句詩) 1수 등이다. 『홍판관운』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문하생인 우헌(愚軒) 채헌징(蔡獻徵)[1648~1726]이 스승의 유작과 차운시를 영구 보존하기 위하여 정서(正書)하고 시첩을 만들었는데, 이후 시회자가 누가 기록하였다. 『홍판관운』은 식산(息山) 이만부의 종손인 이용덕(李庸德)이 보관하였는데, 표지에는 ‘잡록(雜錄)’이라 쓴 왼쪽에 ‘홍판관운(洪判官韻)[목재(木齋)]’라는 부제를 달았다. 표제대로 각 시회가 목재운(木齋韻)을 차운한 것은 후대에 모두 6회이고, 나머지는 목재의 숭도정신(崇道精神)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같으므로 한 시집에 누가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임술시단과 목재시단의 성격을 비교하여 보면, 시회의 작품에서 상산, 낙수에 대한 인식은 대동소이하나, 시작 태도에 있어서는 목재시단이 임술시단에 비하여 문이재도적(文以載道的)이고 교훈성이 짙으며 낙강을 숭도의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인식의 배경에는 목재가 시회를 열었던 1663년은 청(淸)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대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중국 천하에는 유도(儒道)의 맥이 끊어졌으나 조선의 영남에는 유도의 맥이 남았다는 영남 선비의 자부심이 대단할 때라는 점과, 상주의 선비가 영남에 남은 유도의 맥을 도남서원을 중심으로 이어 간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지녔던 때였다. 목재시단의 인식은 후대 도남서원의 향사나 문회 뒤에 갖게 되는 시회에도 숭도 또는 양도(揚道)의 근본 뜻이 담겨 임술시단과는 성격이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임술시단과 목재시단이 보여 주는 성격이 조금 다른 시회와 여기서 탄생한 문학 작품의 다양성은 ‘낙동강 문학’을 오히려 풍성하게 하는 긍정적 효과도 보여 준다.
[현대적 계승]
낙강시회는 낙강시제(洛江詩祭)로 계승하여 재현되었다. 상주시에서는 낙강에 달을 띄우고 시를 노래한 역대 51회의 낙강시회를 계승하여 낙강시제로 개칭하고 2002년 8월에 경천대에서 재현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 ‘계당낙강범주시회’ 이후 140년간 단절된 시회의 재현을 통하여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룬 선인들의 호방한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드날리게 되었다. 2006년부터는 참여한 시인들의 시를 모아 낙동강시화집을 발간함으로써 행사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경향 각지에서 참가한 시인들의 작품은 우리 시의 경향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7년에는 과거의 횟수[51회]를 합쳐서 ‘제57회 낙강시제’라 하여 유구한 문학의 전통을 낙강과 같이 이어 가고자 하였다.
‘낙동강 문학’의 보존과 선양을 모토로 2021년 개관한 낙동강문학관은 낙강시회의 자료를 보존하고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21년 9월 25일 낙동강문학관이 정식 개관한 날에 제71회 낙강시제문학페스티벌이 함께 열려 의미를 더하였다. 낙강시제와 낙동강문학관은 낙강시회의 유구한 뜻을 계승하여 ‘낙동강 문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낙강시회의 정신을 끊임없이 잇는 주춧돌이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낙동강은 상주를 상산으로 별칭한 것과 더불어 상주인의 긍지와 자부심이다. 그래서 상산낙수향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낙강시회는 상주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낙강시회의 공간은 ‘낙동강 700리’ 중에서 제일경(第一景)이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경치를 자랑하는 자연과 상주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문이 잘 어울려 상주의 상징성을 드날리는 마중물이 되었다. 또 동일한 공간에서 근 700년 동안 면면히 시회를 열어 온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낙강시회의 훌륭한 유산은 앞으로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선양하는 중요한 콘텐츠가 될 것이고, 낙강시회의 공간인 상주의 낙동강은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명소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낙강시회는 소식의 적벽유를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면면히 이어 오면서 낙강시회의 문학적 결과물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창조적 결과물로 거듭났다. ‘낙동강 문학’의 원류가 되고, 낙강시회의 뜻과 호방한 문학 정신을 잇는 낙강시제로 계승 및 발전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 ‘낙동강 문학’의 총체적 보존을 위하여 낙동강문학관을 개관하는 데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장차 ‘낙동강 문학’이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 ‘강문학’의 전범(典範)이 될 만한 가치와 새 지평을 열어 갈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