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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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 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Goryeo Dynasty period |
이칭/별칭 | 고려 왕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배상현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 시대 상주는 7개의 속군(屬郡)과 17개의 속현(屬縣), 그리고 경산부(京山府)와 안동부(安東府) 2개의 지사부를 관할하는 계수관(界首官)이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경상북도의 북쪽과 서남쪽 지역이 중심이고,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동남쪽 지역이 일부 포함되고 있었다. 이는 신라 후기 9주 가운데 하나인 상주(尙州)와 대체로 일치한다. 다른 이름으로 상락(上洛)·상산(商山)이라고도 하였다.
[행정 기구의 변천]
상주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이었으나, 신라 첨해왕이 차지하여 주(州)로 삼았다. 법흥왕이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진흥왕이 주(州)를 없애고 상락군(上洛郡)으로 하였다가 다시 신문왕 때 주로 하였다. 뒤에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고쳤으며, 혜공왕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하였다.
신라 후기 상주 일대는 유력한 호족 아자개(阿慈介)가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가은현(加恩縣) 출신인 아자개의 아들 견훤은 후백제를 세워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혜공왕 대 이래 사벌주로 불리던 상주는 940년(고려 태조 23) 다시 상주(尙州)가 되었다. 그 후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쳐졌다가 983년(고려 성종 2) 12목(牧)을 설치하면서 상주목(尙州牧)이 되었다. 995년 12주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면서 귀덕군(歸德郡)이라 부르고 영남도(嶺南道)에 소속되었다.
1012년(고려 현종 3) 절도사가 폐지되고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되었으며 경주와 진주(晉州)를 관할하였다. 2년 뒤인 1014년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가 되었다. 1018년 다시 목으로 하여 전국 8개 목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경주부(慶州府)와 더불어 경상도에 설치된 군현의 상급 행정 기구로 고려 국가 지방 통치의 근간으로 기능하였다.
[속읍과 교통로]
고려 시대 상주의 속군(屬郡)은 문경군(聞慶郡)·용궁군(龍宮郡)·개령군(開寜郡)·보령군(報令郡)·함창군(咸昌郡)·영동군(永同郡)·해평군(海平郡) 등 7개였다. 또 속현(屬縣)이 17개로, 청산현(靑山縣)·산양현(山陽縣)·화령군(化寜郡)·공성현(功城縣)·단밀현(單密縣)·비옥현(比屋縣)·안정현(安定縣)·중모현(中牟縣)·호계현(虎溪縣)·어모현(禦侮縣)·다인현(多仁縣)·청리현(靑理縣)·가은현(加恩縣)·일선현(一善縣)·군위현(軍威縣)·효령현(孝靈縣)·부계현(缶溪縣) 등이었다. 관할하는 2개 지사부(知事府)는 경산부(京山府)와 안동부(安東府)였다.
고을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흐르는데, 1195년(고려 명종 25)에 사록(司錄) 최정분(崔正份)이 옛터에 쌓은 큰 제방이 있어 이름을 공검(恭儉)이라 하였다. 대표적 교통로로 상주도(尙州道)가 있어, 25개 역이 소속하였다. 곧 유곡(幽谷)·낙원(洛原)·낙동(洛東)·청로(靑路)·철파(鐵波)·지보(智保)·통명(通明)·덕통(德通)·옹천(甕泉)·안기(安基)·안교(安郊)·요성(聊城)·수산(守山)·쌍계(雙溪)·안계(安溪)·금조(琴曹)·통산(通山)·송제(松蹄)·연향(連鄕)·구기(仇旂)·우곡(牛谷)·상림(上林)·조계(曹溪)·문거(文居)·화목(和目) 등이다.
[불교 문화와 유산들]
고려 시대 상주는 불교의 번성과 함께 많은 사찰이 법등(法燈)을 밝혔으며, 연등회·팔관회 등 불교 행사가 활발하였다. 예컨대 이규보가 1196년(고려 명종 26) 상주를 방문하여 남긴 글에 11개의 사찰이 등장한다. 최자(崔滋)가 남긴 『보한집(補閑集)』에서는 동지(冬至) 및 팔관회와 같은 절일(節日)에 올리는 여러 주목(州牧)의 하표(賀表) 가운데 상주에서 올리는 것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였다.
고려 시대 상주 지역의 불교문화는 통일 신라 시대의 특징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타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통일 신라기 이후로 조영된 불적(佛蹟)으로 상주 공성면 출토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상주 석조천인상(尙州 石造天人像)·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尙州 曾村里 石造如來立像)·상주 화달리 삼층석탑(尙州 化達里 三層石塔) 등의 보물이 대표적이다. 사찰로는 황령사(黃嶺寺)·용화사(龍華寺)·남장사(南長寺)·북장사(北長寺) 등이 있고, 그 외 통일 신라 후기 범패(梵唄)를 전래한 진감선사(眞鑑禪師) 주석의 장백사(長栢寺)도 융성하였다.
상주 지역 소재의 석조 불상으로는 복룡동의 석불 좌상, 동해사와 목가리 절터의 석불 입상 등이 있다. 석탑은 통일 신라 시기 이래 삼층 석탑이 계속 성행하면서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타고 다층 석탑도 나타났다.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갑장사 삼층석탑(甲長寺 三層石塔)과 목가리 삼층석탑 등은 삼층 석탑의 전형을 보여 주며, 보물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尙州 上吾里 七層石塔)은 다층 석탑의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최근 발견된 상주 도곡리 마애불입상은 고려 시대 불교문화의 단면을 반영한다. 그 외 불구(佛具) 유물로 서곡동 폐사지에서 출토된 신해명 동종(辛亥銘 銅鐘)·백자 은구 대접·동제 연뢰식 국자·동제 파수부 용기·동제 바라 등이 있으며, 서곡동 도림사가 소장하는 동제 바라·동제 향완·동제 접시 등도 고려 시대 상주 지역 불교문화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유교 문화와 무격신앙]
상주의 유교문화는 983년(고려 성종 2) 12목에 외관(外官)을 파견하고 향리의 자제들을 개경에 불러 교육한 데서 유교문화의 시초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유교 교육의 산실이었던 향교(鄕校)가 설치되면서 유교문화가 본격화되었다. 향교는 992년 교서(敎書)에서 “유술(儒術)을 높이고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여 생도들에게 과업(課業)을 권장하였으며, 재능을 겨룰 장소를 펼쳐 경학을 궁구하도록” 하였다고 하여, 유교 교육이 본격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계수관으로서 위상을 가졌던 상주는 경산(京山)·안동(安東) 등 2부(府)와 7개의 속군, 17개의 속현을 거느렸던 만큼 이들 군현에도 향교가 설치되어 많은 학도가 수학하고 유교문화 또한 융성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삼국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려 시대는 무격신앙도 유행하였다. 산천제(山川祭)·기우제(祈雨祭)·성황제(城隍祭) 등의 제의가 널리 성행될 정도로 민간에서도 널리 실행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1275년(고려 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왔던 안향(安珦)의 일화가 전한다.
“당시 여자 무당 3인이 있어 요신(妖神)을 받들고 뭇 사람을 현혹하여 합주(陜州)로부터 여러 군현(郡縣)을 떠돌며 가는 곳마다 소리를 내어 은은하게 꾸짖는 것 같으니 듣는 자가 앞을 다투어 나아가 제사(祭祀)를 설하였다. 비록 수령(守令)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러하였다. 상주에 이르니 안향이 곤장을 치고 칼을 씌웠는데, 무당이 귀신의 말을 의탁하여 화복(禍福)으로 유혹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