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1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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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상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명근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상주 지역의 역사.
[개설]
경상북도 서북쪽에 있는 상주는 서쪽으로 소백산맥, 동쪽으로 낙동강을 품고 있다. 소백산맥 자락의 여러 명산과 낙동강 유역의 너른 벌판을 중심으로 고대에는 사벌국(沙伐國)이 형성되었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상주는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상주 지역은 고대·중세 동안 상주(尙州)·함창(咸昌) 두 고을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가 꽃피웠다. 특히 상주는 경상도의 대읍(大邑)으로서, 조선 전기 동안 경상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상주 출신의 여러 애국지사들이 민족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선사]
선사 시대는 유적과 출토 유물을 통하여 생활 및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까지 상주 지역에서는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상주의 구석기 유적으로는 낙동면 신상리, 함창읍 교촌리, 화동면 어산리, 사벌국면 엄암리 유적 네 곳이 발굴되었다. 신상리 유적의 경우 약 14~15만 년 전에 조성된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서, 경상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굴·조사된 구석기 유적이다. 신석기 유적은 확인되지 않지만, 구석기·청동기 유적이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고, 인접한 김천시 송죽리 등지에서 신석기 유적이 보고된 만큼, 향후 신석기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농경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상주에서는 낙동강 인근을 비롯하여 병성천·북천·이안천 유역의 충적 평야를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 상주의 청동기 시대 유적은 크게 고인돌, 선돌, 민무늬토기 산포지, 주거지 유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고인돌 유적은 낙동강과 여러 지류가 내려다보이는 구릉 사면에 조성되었다. 특히 청리 유적에서는 고인돌 15기와 함께 주거 유적이 발굴·조사되었다. 상주 복룡동 유적[사적]은 상주를 대표하는 청동기 유적이다. 상주 복룡동 유적에서는 송국리(松菊里)형 주거지 2동이 확인되어 경상도 내륙 지방과 충청도 지역 간의 문화 전파 경로를 보여 준다. 다만, 사벌국(沙伐國)의 중심지인 사벌국면 일대에서는 뚜렷한 청동기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상주 지역 청동기인과 사벌국 간의 관계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고대]
고대 상주의 중심지는 사벌국[사량벌국(沙梁伐國)]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사벌 들판 일대이다. 상주는 낙동강과 낙동강 인근 지류를 활용한 농업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또한 상주시 공검면에는 원삼국 시대에 조성된 공검지가 있다.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교통의 요지라는 점도 이른 시기 상주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사벌국은 지금의 상주 시내 중심부와 병성동, 낙동강을 접하고 있는 낙동면과 중동면 일대까지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이부곡 토성(吏部谷 土城)은 국읍(國邑)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옛 함창(咸昌) 지역에는 고령가야(古寧伽倻)가 있었다고는 하나,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재위 247~261] 대에 사벌국의 존재가 처음 언급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석우로전에는 “[첨해왕 때] 사량벌국은 옛적부터 우리에게 속하여 있었는데, 갑자기 배신하여 백제에게 귀의하므로 석우로가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3세기에 신라와 백제가 상주에서 충돌한 기록은 의구심이 들지만, 해당 기사는 사벌국의 전략적 위치를 잘 보여 준다.
사벌국이 복속된 이후, 신라는 사벌주(沙伐州)로 삼고 군사와 관리를 파견하여 팽창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이에 525년 신라 법흥왕은 상주(上州)로 명명하고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을 사벌주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고전을 인용하여,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까지 노리는 당나라의 야욕을 저지하고자 김유신이 상주 외곽 당교(唐橋)에서 잔치를 열고 독주를 먹여 당나라 병사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이 또한 상주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중앙 집권적인 지방 통치 체제를 마련하여 갔다. 이에 신문왕은 685년에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때 상주(上州)의 치소는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인 일선주(一善州)였는데, 2년 뒤인 687년 사벌주로 치소를 옮기고 1,109보 둘레의 성(城)을 쌓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오늘날의 명칭인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재위 765~780] 대에 사벌주로 명칭을 되돌렸다. 이로써 상주는 명실상부 영남을 대표하는 대읍(大邑)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울러 상주는 인근의 10개 군(郡)과 30개 현(縣)을 관장하였다. 한편, 지금의 상주를 구성하였던 함창은 삼국 시대에 고동람군(古冬攬郡)이 두어졌다가, 신라 경덕왕 대에 고령군(古寧郡)으로 개칭되었다.
고을의 성장과 함께 불교문화도 꽃피웠다. 832년(흥덕왕 7)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774~850]가 장백사(長柏寺)[현재의 남장사]를 창건하였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쌍계사 「진감화상비명(眞鑑和尙碑銘)」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국사가 상주 노악산 장백사에서 선(禪)을 가르치니 배우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 외에도 진감국사는 839년(문성왕 1) 용흥사(龍興寺), 833년(흥덕왕 8) 북장사(北長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후대 기록에 따르면, 638년(선덕왕 7)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황령사(黃嶺寺), 676년(문무왕 16)에는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시대]
통일 신라 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신라 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약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방에 웅거한 호족 세력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상주에서는 가은현(加恩縣) 출신의 아자개(阿慈介)가 지배력을 행사하다가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아자개의 아들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웠다.
고려 시대에도 상주는 대읍으로서의 읍격을 유지하며, 7개의 속군(屬郡)과 17개의 속현(屬縣), 그리고 경산부(京山府)와 안동부(安東府) 2개의 지사부를 관할하는 계수관(界首官)으로 존재하였다. 고려 정부는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하여 여러 차례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 그 과정에서 상주의 읍명과 속현의 이속도 거듭되었다. 940년(태조 23) 다시 ‘상주(尙州)’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쳐졌다가 983년(성종 2) 12목(牧)을 설치하게 되면서 상주목(尙州牧)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 12주에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면서 귀덕군(歸德郡)이라 하였고, 영남도(嶺南道)에 소속되었다. 1012년(현종 3)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1014년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상주목이 되었다. 한편, 상주는 영남을 대표하는 대읍으로서, 고을 명칭인 ‘상(尙)’이 광역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1105년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를 시작으로 경상주도(慶尙州道),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를 거쳐 1314년(충숙왕 1)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고령군으로 존재하였던 함창은 965년(광종 15) 함녕군(咸寧郡)으로 개칭하였으며, 상주의 속군(屬郡)이 되었다. 이후 함창군으로 개칭하고, 1172년부터는 감무(監務)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상주에서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문화도 발전하였다. 992년(성종 11) 정부는 지방의 주·군에 학교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때 상주에도 유교 교육의 산실인 향교(鄕校)가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동안 지금의 상주 지역은 상주목(尙州牧)과 함창현(咸昌縣) 두 고을 체제로 운영되었다. 상주목은 신라 때부터 행정·군사·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초기 계수관으로서 청리현(靑理縣)·화령현(化寧縣)·중모현(中牟縣)·단밀현(丹密縣)·산양현(山陽縣)·공성현(功城縣)·영순현(永順縣) 7개 속현과 장천부곡(長川部曲)·연산부곡(連山部曲)·무림부곡(茂林部曲)·평안부곡(平安部曲) 4개 부곡을 거닐었다. 또한 1408년(태종 8)부터 임진왜란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된 행정의 중심지였다. 국왕이 있는 한양과 가깝고 모든 세곡의 집결처이자 통로였기 때문에 감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감영이 대구로 이전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가 통치함으로써, 행정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교통·군사·경제의 거점으로 존재하였다. 조선 시대 진관체제(鎭管體制) 하에서도 상주목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상주진관(尙州鎭管)에 진영장(鎭營將)이 두어졌고, 인근 12개 군현의 지방군을 관장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진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함창현에는 1413년(태조 13)부터 감무 대신 현감을 파견하였다. 함창현은 상주 경내에 월경처(越境處)인 은척소(銀尺所)와 영순현(永順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 후기까지 상주목과 함창현의 속현 및 향소부곡은 점진적으로 면리(面里)로 개편되었다.
호수와 인구의 경우 15세기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상주목이 1,845호, 3,132명, 함창현은 368호, 2,140명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주목은 1832년 『상산읍지(商山邑誌)』에 1만 8507호, 7만 110구, 함창현은 1832년(순조 32) 『경상도읍지』에 2,746호, 9,873명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호수와 인구 증가는 행정력의 발전도 있겠지만 농업 생산량 향상도 큰 요인이 되었다. 특히 상주 지역에는 19세기에 이르러 공검지(恭儉池), 대제지(大堤池)·불암지(佛巖池)·죽전지(竹田池)와 같은 저수지와 굴사제(掘史堤)·말지제(末只堤) 등 50여 개에 이르는 수리 시설이 확인된다. 농업 기술의 발전, 황무지 개간, 이앙법의 보급으로 전결 수도 늘어났다. 183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상주목의 전결은 모두 15,489결 2부 5속, 함창현은 2,749결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 동안 상주 지역에서는 사대부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 이래 상주목의 토성으로 김(金)·박(朴)·주(周)·황(黃)씨가 있었으며, 함창현은 김(金)·오(吳)·임(任)씨가 있었다. 그 외에도 속현과 임내의 여러 토성이 있었다. 토성 세력은 고려 시대까지 상주 지역의 향직을 세습하였지만, 고려 후기 이후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 상주의 4개 토성과 함창의 김씨에서 사족(士族) 가문으로 성장하는 계열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혼인 관행이었던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과 남녀균분상속을 매개로 타읍 출신의 사족 가문을 상주 지역으로 견인하였고, 조선 전기에 이르면 사대부 중심의 향촌 질서가 구축되었다.
상주·함창의 사대부들은 사회·문화적으로 안동 퇴계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지리적으로 충청도와 인접하고 상주가 송준길(宋浚吉)의 처향인 관계로 호서학파로 대표되는 서인 내지 노론계의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상주 지역은 퇴계학과 호서학, 남인과 서인·노론이 대립·공존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세력들은 각기 도남서원(道南書院), 흥암서원(興巖書院), 옥동서원(玉洞書院), 옥성서원(玉成書院), 근암서원(近嵒書院), 봉산서원(鳳山書院), 서산서원(西山書院), 속수서원(涑水書院), 연악서원(淵嶽書院), 효곡서원(孝谷書院), 화암서원(花巖書院), 충렬사(忠烈祠), 충의단(忠義壇), 임호서원(臨湖書院), 청암서원(淸巖書院), 기양서원(岐陽書院), 기산사(箕山祠), 율봉사(栗峰祠), 경충사(景忠祠), 신안사(新安祠) 등의 서원과 사우를 중심으로 학문적으로 각기 결집하고, 향촌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상주·함창의 사대부들은 각 학파를 중심으로 학문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국난을 당했을 때는 절의 정신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진격로에 있었던 상주·함창의 사대부들은 의병을 일으켜 적군과 맞섰다. 또한 북천(北川)·당교(唐橋) 등지에서 관군 및 의병이 일본군과 접전을 펼쳤다.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는 손경석(孫景錫)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개항기]
1876년 개항 이후 근대적 사상이 유입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도 근대식 개혁을 통하여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1895년 제2차 갑오개혁[을미개혁]의 일환으로 23부제(二十三府制)를 실시하였다 아울러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 지방 행정 구역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였는데, 이때 상주목과 함창현은 안동부(安東府) 관할의 상주군(尙州郡)과 함창군(咸昌郡)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지방 행정의 불합리성 때문에 1896년 8월 기존의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상주군·함창군은 나란히 지금의 경상북도로 편제되었다.
조선 정부의 근대화 노력과 별개로 국내외 정세 변화와 열강의 경제적 침탈, 그리고 근대 사상의 유입은 전통적인 질서 체제를 위협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이래 누적된 조세 문란과 신분제 모순 속에 하층민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미 1862년 임술민란(壬戌民亂) 때 상주 지역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삼정(三政)과 관련된 장부와 아전들의 집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동학(東學)이 상주 지역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상주의 동학 세력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동안 일본군과 보수 유림 및 향리 세력이 결성한 민보군(民堡軍)과 충돌하였다.
한편,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흐름 속에 서양 열강의 침탈에 저항하는 유림들의 활동이 상주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먼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상주에서는 류주목(柳疇睦)을 중심으로 의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1881년에는 조선 정부가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추진하자, 영남의 유림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며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하였다. 이때 상주에서는 24명의 유림이 참여하였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민족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왜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1895~1896년의 전기의병 때는 상주 유생들이 주로 김산의진(金山義陣)에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의 후기 의병 때는 김진구(金鎭九)·이원재(李元宰)·채섬환(蔡暹奐)·유규년(柳奎秊)·김만원(金萬源) 등이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에 참여하였고, 노병대(盧炳大)·조운식(趙雲植)은 독자적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의병전쟁과 별개로 상주 지역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과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개되었다. 상주에서 신교육구국운동은 1906년 광흥학교(廣興學校), 1908년 풍창학교(豊昌學校), 1909년 남명학교(南明學校) 등과 같은 사립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상주의 혁신 유림이 주축이 되어 1907년 상주 지역에서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고 우리 민족을 1945년 8월까지 지배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제는 우리 민족에 대한 사회·경제적 수탈을 이어 나갔고, 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선적으로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 통치를 위하여 1914년 지방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상주군은 함창군을 통합하고, 18개 면 237개 동으로 개편되었다. 1917년에는 면제(面制)가 시행됨으로써, 각 면이 식민 통치 업무를 처리하였다. 1931년 4월 1일에는 읍면제(邑面制) 실시로 상주면이 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을 설치하여 상주·문경·예천 지역의 사법 업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치안 업무와 우리 민족의 감시·탄압을 위하여 일제 강점 초기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상주군에 헌병분견소가 설치되었고, 1919년 보통경찰제도 실시 이후에는 상주경찰서가 설치되어 식민지 통치의 전위대 역할을 하였다.
우리 민족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인적·물적 수탈이 강화되자,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상주의 민족 지사들도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1910년대 무단 통치기 상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으로는 채기중(蔡基中) 주도의 비밀결사 조직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 활동이 주목된다. 1919년 3·1 운동 때는 3월 23일 상주장터, 3월 29일 상주군 이안면 소암리, 4월 4일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 소위 문화 통치 아래에서는 서로군정서 무관학교 생도 모집 사건을 필두로 1922년 의용단 군자금 모집 사건, 1923년 의열단 폭탄 반입 사건, 1929년 박열(朴烈)이 일본 국왕을 살해하려 하였던 소위 ‘대역사건(大逆事件)’과 같은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0~1940년대 전시 체제 하에서는 1943년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조선회복연구단 사건, 1944년 흑백당 사건 등에 상주 출신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김길상(金吉相)·김만식(金萬植)·김영이(金榮伊)·박하규(朴夏圭)·이창재(李昌宰)·한상열(韓相烈) 등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상주 출신 인사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독립 정부가 구성되지 못하고, 38선 이남은 미군정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그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 세력 간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다. 상주에서는 1946년 우익 인사들 주도로 상주군국민회(尙州郡國民會)를 설립하였고, 1946년 9월 31일에는 좌익 세력이 주도한 상주우편국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1950년의 6·25 전쟁은 민족 간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하였으며, 북한군 제15사단이 상주 화령으로 공격하여 들어왔다. 결국 상주는 점령되어 7월 30일부터 9월 하순까지 북한군 통치 아래 있었다. 이 시기 북한군은 상주군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우익 인사를 처단하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로 징집하였다.
6·25 전쟁이 끝나고 해외 원조 하에 전후 복구 사업이 전개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빠른 경제 성장을 일구었다. 이에 맞추어 행정 구역도 본격적으로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12월 1일 함창면이 함창읍으로 승격하였고, 1986년 1월 1일에는 상주읍이 상주시로 승격하였다. 이어 1995년 1월 1일에는 상주군과 상주시가 통합하여, 지금의 도농 복합 도시 상주시가 출범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크게 발전하였지만, 상주는 대도시로의 인구 유출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맞이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까지 26만여 명에 이르던 인구는 2022년 9만 4823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성장 동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주는 천혜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활용한 관광 자원 개발과 쌀, 곶감, 한우, 양잠 등 지역 특산물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통하여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환점을 마련하고 있다.